가랭이 딸
여자 술 주정꾼이 차에 올랐다.
작달막한 키에 강파듬한 몸매, 챙이 큰 모자를 눌러 썼다. 버스 승차 계단에 올라서서 걸걸한 소리로 길에 남은 친구를 향해 잘 가라는 인사를 하는데 목을 돌린 채 빨리 올라서지 않는다. 운전사가 올라서라고 재촉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인사치레에 바빴다. 차가 출발을 못하고 붕붕거렸다.
이삼 분쯤 지났다. 운전사는 물론 승객들도 불쾌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뒤따르는 차가 빵빵거리고 경적을 울려도 끄떡 않다가 운전석을 향해 혀꼬부라진 소리로,
"운전수우, 이이 차, 어디까지 가아?"
반말도 그렇지만 억양이 더 기분 나빴다.
"먼저 올라서세요. 아주머니는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종점 가냐?"
"예, 갑니다."
"그럼 됐다. 가자아."
육십이 다 되어 보이는 얼굴에 짙게 바른 화장이 지워져 얼룩얼룩하다. 오십쯤 보이는 깡마른 운전사는 못마땅한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여자가 올라서서 비틀거리자 바로 앞에 앉았던 아가씨가 자리를 내주었다.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 털썩 앉으며 운전사에게 주정을 했다.
"야아아. 너어 거울로 날 바라보면 어쩌자는 거어야?"
"손님이 안전하게 앉으시는지 확인하는 중입니다."
"확이인? 그래 내가 넘어지기라도 할 것 같아서 확인이냐아? 이이…"
"……"
*2
"왜 대답이 없어어? 이 차 돈암동 가냐아?"
"갑니다."
"가아? 가면 됐다."
여자는 무슨 말인가를 계속 씨부렁거리다가 벌떡 일어서며 운전사에게 또 물었다.
"야아. 돈암동 멀었냐아?"
"다 와 갑니다."
"나 내려 주라아. 차 세워어."
"여기서요?"
"이인마 내가 언제 여기라고 했어어? 제대로 알고 대답을 해애. 그래애 네가 나를 여기다 내려 놓겠다구우?"
"누가 여기다 내려드린다고 했습니까?"
"네가 그랬잖아아―"
말은 유순했지만 운전사의 눈빛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화를 잘 참아냈다. 여자는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그녀의 눈길을 피해 창 박으로 고개를 돌렸다.
"좋다 이거야아, 모두 내가 싫다 이거어지. 흐흐흐. 못난 것들."
혼자 킥킥거리고 웃다가 운전사에게 또 말을 걸었다.
"야아, 다아 와, 왔냐?"
운전기사는 화를 문 채 혼잣말로 지껄였다.
"더러워서 원……"
"뭐어, 너 뭐라고 지껄였냐아? 더럽다아? 내가 어디가 더러우냐? 너 이놈아아 내가 어디가 더러우냐? 이 씩구멍 같은 놈아아."
"……"
"왜 말을 못 해애 이 똥을 싸고 자빠질 놈아아."
*3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승객들이 킥킥거리며 여자 얼굴을 보았다. 참으로 천박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시커멓고 옴팡한 눈이며 자글자글한 주름살이 인생을 얼마나 모질게 살아 왔는지를 그려주고 있었다.
"왜애 웃고 지랄들이야아? 운전수 이노옴, 너 나보고 더럽다고 했지? 내가 어, 어디가 더럽다는 거냐아? 너 월급 잘 타먹고 살만 하니까 보이는 게 없다 이거지이? 손님 보고 더럽다고? 너 모가지가 몇 개냐? 오늘 네 모가지가 마지막인 줄 알아라아 이 노옴."
표정과는 달리 운전기사는 유순하게 말했다.
"손님, 돈암동 다 왔습니다. 내릴 준비하시지요."
"내리라고오? 나 보고 내리라고오? 못 내려! 이 얽은벌거숭이 같은 놈아, 내가 그냥 내릴 줄 알고오? 종점까지 가자아 이놈. 파출소로 가서 차 세워어!"
몇 정거장 지나는 동안 승객들은 거의 다 내리고 차에는 너덧 명이 앉아 지글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내리는 사람마다 싸늘한 눈으로 흘겨보기도 하고 어떤 젊은이는 침을 칵 뱉더니 발로 비비고 내려갔다.
운전사는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렸다. 여자가 운전사 등에 바짝 다가서서 지껄였다.
"너어 파출소 아알지?"
"손님, 이러지 마세요. 정말 그러시면 파출소로 갑니다."
"가자아 이놈아. 내가 먼저 가자고 했잖아아 이 똥쌀 놈아아."
"이 아주머니 보자보자 하니 너무 하시는군."
"너무 해애? 내애가 무얼 너무 했냐, 이놈아아."
"조용하지 못해요?"
"못 한다 이놈아, 너 나보고 더럽다고 했어, 운전수 주제에 손님 보고 더럽다고오?"
* 4. "기가 막혀서 원……"
"너 손님한테 그것밖에 못해애? 차 세워. 너 같은 놈은 콩밥을 먹어야 정신 차려."
그 꼴을 지켜보던 상우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너언 뭐야, 너도 한 패냐아?"
"많이 취하셨어요. 조심하세요."
"누가 취이해? 조심하라고오? 네나 입 조심해애!"
상우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참다 못한 기사가 한 마디 했다.
"아주머니, 저리 가서 앉으세요."
"네가 뭔데 앉으라 서라 지랄이야아. 넌 나한테 더럽다고 했어. 손님한테 욕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알지? 네놈은 콩밥을 먹어야 해. 차 파출소로 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이런 여자아? 너 몇 살이냐아?"
"나이를 곱게 먹어야지, 나도 당신이나 비슷하오. 술을 먹어도 나이 값은 해야지, 여자가 이게 무슨 꼴이오. 참으려도 더러워서 못 참겠구먼. 당장 내려요"
"못 내린다 이놈아. 파출소에 대랬잖아아?"
"그럽시다. 소원대로 파출소 신세 좀 져보시오."
차가 파출소 앞에 섰다. 여자는 운전사의 멱살을 잡아 끌며 소리쳤다.
"내려 이놈아아, 오늘 네 모가지 달아나는 날인 줄 알아라아 이 못된 노옴!"
행패는 제가 부려 놓고 마치 큰 피해나 입은 사람처럼 운전사 멱살을 잡고 내리는 꼴은 어이가 없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운전사가 잘못을 저지르고 승객에게 끌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운전사는 불쾌한 얼굴로 여자를 뿌리쳤다. 여자는 악을 쓰며 마치 자기가 피해를 입은 사람처럼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다.
상우는 차창으로 내다보다가 아무래도 운전사가 여자의 행패에 피해를 입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일어나 파출소로 따라 들어갔다. 여자가 시뻘건 얼굴에 침을 튀기면서 경찰관에게 주절거렸다.
"이 못된 놈을 가만 두면 안 된다구우, 손님 보고 욕을 해대는 운전수 놈을 가만 두면 안 된다아 이 말이야아. 경, 경저씨, 아시겠수우?"
"무슨 일입니까?"
운전사가 대답했다.
"기가 막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운전수 생활 30년에 이런 꼴은 처음입니다. 이래가지고 어떻게 세상 살겠습니까?"
여자가 걸걸한 음성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이런 놈은 당장에 모가지를 쳐야 해! 손님을 뭘로 알고 입방아질이야아."
"자, 두 분 자리에 앉으시오. 무슨 일인지 들어봅시다. 잘못한 게 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두 분 신분증 좀 보십시다."
"신분증이 뭐야아.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신분증을 내애? 나 그런 거 없어어."
*5. "그런 것도 없이 술을 먹고 다녀요?"
"술 먹는데 무슨 도민증이 필요하다는 거야아? 세상 살다가 별 소릴 다 듣겄네에"
"이봐요, 여기는 파출소예요."
"그래애, 내가 파출소로 왔다. 이 운전수 이놈을 콩밥을 먹여야 해, 나보고 더럽다고 했어, 이놈아, 내가 어디가 더럽냐아 어디가 더럽냐구우? 이 씩구멍 같은 놈아아."
경찰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주머니, 집이 어디요?"
"돈암동."
"운전기사가 무슨 잘못을 했다구요?"
"가만히 있는 나한테 더럽다고 했다니까아. 길을 물었더니 운전수가 더럽다는 거야아. 손님 보고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나아?"
"욕을 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만…"
"그렇지? 안 되지? 욕을 하면 안 되는 것이지이?"
경찰이 기사에게 물었다.
"정말 가만히 있는 분에게 욕을 했단 말입니까?"
"가만히 있는 사…"
여자가 기사의 말을 잘랐다.
"저 능구렁이 같은 놈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입을 벌려어, 엉?"
여자의 행동거지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경찰관이 정색을 하면서 물었다.
"이봐요, 여기는 당신네 집이 아녜요. 묻는 대로 대답해요. 거짓말 하면 안 돼요. 주소가 어디요?"
여자는 약간 찔끔해서 대답했다.
"돈암동…"
"몇 번지지요?"
"모르겠는데에."
"그럼 본적은 어디요?"
"고향은 알아도 본적은 모르지… 내 고향은 경기도 평택군 정자골."
"이름은?"
"김명지……."
정자골 김명지!
상우는 여자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리고 명지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입 속으로 되뇌었다. 명지, 명지라…
2
* 6
상우는 여섯 살 때 일을 회상했다.
일제 말기, 초가지붕이 수그리고 엎드린 시골 마을에는 집집마다 식구는 많고 먹을 것이 없었다.
아침저녁 밥상은 멀건 죽 그릇이 전부였고 어른들은 홑바지에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고 아이들은 코를 질질 흘리며 팔소매로 콧물을 닦아 소매 끝이 반질거렸다.
어른들은 홑바지라도 입었지만 남자아이들은 모두 맨발에 아랫도리는 벗고 사는 집이 많았다. 그래도 여자 애들은 홑치마라도 입어서 밑은 가리고 다녔다.
상우는 콩깻묵 한 덩어리를 들고 썩지 않은 곳만 골라 먹었지만 엄마는 이웃 사람들과 산으로 풀뿌리를 캐러 갔다. 보리밭은 파랗게 언덕을 덮고 있었지만 보리가 익으려면 아직도 보름은 더 있어야 했다.
봄이 오고 해가 밝아도 온 동리는 가난의 그림자에 가린 채 찌들어 어디고 밝은 곳이 없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명수네만은 세 끼를 잘 먹고 살았고 그 애만은 엿장수가 오는 날 돈을 주고 엿을 사먹을 수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누더기 옷을 입었지만 명수와 여동생 명지는 물색 고운 옷을 입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속에서도 동네 어른들은 돈이 어디서 나는지 술만은 거르지 않고 마셔댔다.
밤마다 노름할 돈까지 챙기고 사는 어른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명수 엄마는 술집을 했다. 그래서 그 집에는 술꾼들이 우글거리기도 하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화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명수 엄마는 언제나 부잣집 여자처럼 화장을 곱게 하고 어른들 틈에서 바쁘게 살았다. 그 집은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었고 부엌과 두 칸짜리 방과 마루가 딸린 집으로 부엌 뒤로 추녀를 따라 돌면 헛간이 붙은 집이었다.
어느 날 명수가 상우에게 자기 집 자랑을 했다.
*7. "우리집 윗방에는 별게별게 다 있다. 너 구경해 볼래?"
"뭔데?"
"따라와 봐, 우리 엄마한테 들키면 혼나, 너만 구경시켜주는 거야. 아무도 데려오지 말랬어. 들어와 봐."
명수를 따라 윗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놀랄 만큼 굉장했다.
한쪽에는 향긋한 냄새가 도는 술항아리가 있고 옆에는 제삿날에나 볼 수 있는 음식들이 수두룩했다.
계란 붙임, 빈대떡, 사과, 배, 감주, 산자, 깨과자, 삶은 돼지고기, 고깃국 등등. 명수가 침을 꼴깍 넘기며 상우를 보았다. 상우는 배가 뒤틀릴 만큼 먹고 싶은 것을 참았다.
한쪽에는 상이 예쁜 상보로 덮여 있었다. 명수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먹고 싶지?"
"응…"
"나도 먹고 싶어, 그런데 먹으면 우리 엄마가 금방 안다…."
이때 갑자기 밖에서 명수 엄마가 안방문을 열면서 아들을 불렀다. 자지러지게 놀란 명수가 상우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 저기 병풍 뒤에 숨어 있어. 너 데리고 온 것 알면 나 죽어…"
"알았어."
상우는 병풍 뒤로 숨고 명수는 안방으로 나갔다.
"엄마, 왜 벌써 왔어, 한참 있다가 온다더니?"
"이장님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빨리 왔다. 너 명지 어디 있는지 찾아보고 만나거든 이것 가지고 나가서 엿장수 오면 사먹고 해 지거든 들어와, 알았지?"
"……"
명수는 엄마가 주는 돈을 들고 나갔다. 바로 그 애가 나간 문으로 이장님이 들어왔다. 명수 엄마는 윗방에 차려 놓은 상을 들고 나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주앉아 술을 마셨다.
*8
"김서방은 어디 멀리 갔어?"
"내일 오기로 했어요. 사촌누이네 집에 갔어요."
"또 올 사람 없어?"
"애들은 해가 져야 올 것이고 다들 일 나갔는데 누가 오겠수?"
"우리끼리 오붓하게 됐군."
"그러니까 이렇게 오시라고 한 것 아니겠수?"
"요것, 참 볼수록 귀엽다니까. 김서방 혼자 데리고 살기엔 아까운 여자야."
"거짓말……"
"아니야, 당신 정말 예뻐, 우리 마누라하고 바꾸자면 당장 바꾸고 싶다니까."
"자요, 술이나 드세요. 마님 들으시면 큰일날 소리는 그만 두시고요."
"저어, 지난번에 말한 거 여기 있어. 받아."
"어머, 그렇게 빨리 되셨어요?"
"누구 부탁인데. 자 받아 넣으라고."
"잘 쓰겠어요."
"자, 이리 와……."
"급하시긴, 술이나 한잔 더 드시우."
"술이 문젠가. 술이야 시간 있을 때 먹으면 되지."
술상이 윗목으로 밀려나고 아랫목에는 이불이 깔렸다. 문을 걸어 잠근 두 사람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상우는 이불자락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살금살금 나와 문틈으로 안방을 훔쳐보았다. 방문 쪽으로 이장 어른이 벗어 놓은 옷이 밀려나 있고 그 위로 명수 엄마 옷이 흘러내렸다.
이장 어른은 엎드려 명수 엄마를 누르고 이불자락이 풀썩풀썩 바쁘게 들썩거렸다. 그렇게 하기를 얼마 동안 쉬지를 않았다.
*9
두 어른은 숨이 가쁜 듯 식식거리다가 짐승이 우는 소리를 냅다 지르더니 이불자락을 훌떡 젖혀 버리고 벌렁 누웠다. 그리고 이장 어른은 명수 엄마 사타구니에 손을 대고 쓰다듬었다.
시커면 명수 엄마 가랑이에는 풀 그릇을 엎지른 듯 젖어 있고 가슴이 불룩거리는 이장 어른은 가슴에서부터 아랫배 밑으로 사타구니까지 짐승처럼 털이 부숭부숭 나있고 털이 땀에 젖어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점잖은 이장 어른 가슴이 그렇게 털투성이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상우였다.
무엇인가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상우는 눈을 가리고 말았다. 그리고 살금살금 제 자리로 돌아가 옹크리고 앉았다.
도대체 이불 속에서 무엇을 했기에 두 사람은 그렇게 땀을 뻘뻘 흘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른들은 동물 같다. 어른들은 얼굴보다 무섭다. 어른들은 징그럽다. 질퍽하게 젖은 사타구니를 만지는 이장 어른…… 이상하고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상우는 가슴을 조이며 병풍 속에 숨어서 바깥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상 앞에 앉아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상우는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 없이 빨리 나가게 되기를 빌었다. 어른들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명수는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일까? 해가 지려면 아직도 멀었나 보다. 명수가 날마다 돈을 가지고 나와서 엿장수한테 엿을 사먹을 수 있는 것은 이럴 때 돈을 주고 나가 있으라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 애는 우리 동네 골목 대장이다. 아무도 그에게 대들지 못한다. 힘이 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엿장수가 오는 날이면 그 애가 사주는 엿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그 애한테는 덤벼들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애가 모이라고 하면 모였다가 가라고 해야 돌아갈 수 있을 만큼 힘이 센 골목대장이다.
*10
명수에 대하여 이것저것 생각하는 동안 그 애가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명주도 함께 나갔다가 따라 들어왔다. 이장 어른이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명수 엄마도 고추밭에 갈 일이 있다면서 나갔다. 명주도 엄마 따라 나갔다. 명수가 윗방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상우야, 나와."
상우는 졸다가 일어난 것처럼 느릿느릿 기어 나왔다.
"너 잤니?"
"응, 졸려서……"
"너 아무 것도 모르지?"
"으응? 뭘"
"모르면 됐어. 난 또 네가 알았으면 어떡하나 했지. 너 정말 잠들어서 아무 것도 모르지?"
"응, 아무 것도."
"빨리 나와, 잘 가."
상우는 급히 방을 나와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밤에 잠을 자려고 눈을 감아도 겁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른들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였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상우는 들에 심부름을 갔다 오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비를 피하여 급히 달려 가까이 있는 명수네 집으로 뛰어 들었다. 빗소리만 요란하고 집안은 조용했다. 상우는 젖은 옷을 털며 명수네 마루에 걸터앉았다. 방안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명수 엄마 생각이 나서 방안을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깜짝 놀랐다. 방안에서는 명수 엄마가 장수 아버지와 뒹굴고 있었다. 놀라서 얼른 부엌 뒤에 붙은 헛간 안으로 들어갔다.
"어!"
*11
상우는 그만 놀라 말도 못한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집단을 깔아 놓고 거기 명수와 명주가 벗고 누워 어른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가랭이를 벌리고 누워 있던 명주가 상우를 보자 숨죽인 소리로 말했다.
"오빠, 상우야."
명수는 벌떡 일어났다. 명수가 빳빳이 선 아래를 가렸다. 놀란 명주는 그대로 누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 애의 하얀 아랫도리와 빨갛게 벌어졌던 가랭이를 힐끗 보고 돌아섰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명수가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너 아무 것도 보았다고 하면 죽어, 알았지?"
"응, 아무 것도 안 봤어."
명주는 올려 젖혔던 치마를 내리고 짚단에 얼굴을 가리고 밖에는 소낙비가 좍좍 쏟아지고 있었다. 명수와 명주는 방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금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거기서 그렇게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상우는 빗줄기를 뚫고 달렸다. 빗줄기가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명수 엄마와 이장 어른과 장수 아버지와 명수와…… 머릿속에 흠집이라도 난 것처럼 새겨져 들어오는 명주의 하얗게 벌린 아랫도리였다.
며칠을 두고 생각해도 명수네 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혼자 삭히기에는 힘들었다. 어른들 이야기는 무서워서 할 수 없었지만 명수와 동생과 어쩌고저쩌고는 입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가장 친한 광호한테만 비밀을 말하기로 했다.
"광호야, 너한테만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뭐야?"
"꼭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알았지?"
"알았어 비밀 지킬게."
*12
상우는 비오는 날 명수네 헛간에서 보았던 것을 낮고 심각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알았지? 비밀이야."
"알았어, 나만 알고 있을게."
둘의 비밀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너만 비밀이야 하는 속에 온 동네 꼬마들에게 다 퍼져버리고 말았다. 며칠이 못 가서였다. 명수가 골목 아이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골목 아이들을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가 대장이기 때문에 모이라고 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골목 안 아이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못하고 모인다.
햇볕이 내리쬐는 장작더미 위에 아이들은 아래위로 계단을 이루고 걸터앉았고 명수가 두서너 발 앞에 버티고 서서 호통을 쳤다.
"누구야, 고자질한 놈 나와. 고자질한 놈은 죽여버릴 거야."
상우는 가슴이 뛰었다. 명수가 자기를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명수가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광호가 그랬을까?
"너 나와 인마."
그 애의 손가락이 상우를 가리켰다.
"나? 난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어."
"거짓말 마 인마."
"난 아니야. 안 그랬어."
이 마을에서 아무도 상대해 싸울 수 없을 만큼 사나운 아이가 명수였다. 게다가 그 애의 엄마는 얼굴이 예뻐서 마을 어른들이 모두 절절매었다. 명수는 동네 어른들까지도 알아주는 대단한 아이였다.
남들은 죽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형편인데 그 애만은 쌀밥에 조기를 뜯어 얹어 주어도 싫다고 하는 부러운 아이이기도 했다. 동네 어른들은 자기 집에는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도 모르면서 그 애 엄마한테는 무엇이든 가져다주고 술을 마시고 그 무릎에 얼굴 묻고 눕는 것을 좋아했다. 그 엄마는 부자처럼 지내고 있었다.
*13
명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엄마의 사랑을 극진히 받는 아이라 아무도 그 애를 건드리지 못했다. 만약 그 애를 건드리는 날이면 그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때린 아이의 아버지는 자기 자식을 가만 두지 못했다. 동네 아이들은 그 애 엄마와 자기 아버지가 두려워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그 애보다 힘이 센 영근이가 있었다. 하지만 명수를 때렸다가 그 엄마에 못 이기는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고 난 뒤부터는 명수 앞에서는 그 애도 기를 펴지 못했다.
명수가 상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너 정말 가만 있을래?"
명수가 상우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턱을 툭 쳐 올렸다. 상우는 잠잠했다. 그 애의 성난 손이 상우 뺨을 갈겼다. 아이들은 모두 겁먹은 눈으로 명수를 바라보았다. 상우는 눈을 내리뜨고 몇 차례 얻어맞았다. 명수의 주먹이 그칠 줄 모르고 날아들었다. 상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짜식아, 너 보고 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지?"
명수가 다시 상우의 왼뺨을 갈겼다. 아이들은 명수가 무서워 옆으로 물러섰다. 그 애는 화가 나면 아무나 다 두들겨 패는 습관이 있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애는 화난 얼굴로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정호의 뺨을 갈겼다. 정호는 아무 죄도 없이 한 대 맞고 물러앉아 얼굴을 문질렀다. 아이들은 명수가 때려도 달아나지 못한다. 달아났다가는 나중에 더 많이 맞기 때문이었다. 명식은 정말로 무서운 아이였다. 그래서 골목 아이들이 엄마 말은 안 들어도 명수가 시키는 일은 무엇이나 했다.
"너 오늘 죽었어. 집에 못 가. 가만 둘 줄 알아?"
명수가 이번에는 발로 상우의 다리를 걷어찼다. 상우는 분하고 가슴이 뛰었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만약 대들었다가는 그 애 엄마한테는 물론 아버지한테도 되게 맞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맞붙을 수가 없었다.
*14
상우는 참다가 '너한테 맞고 오늘 못 들어가느니 죽도록 두들겨 주고 달아날 거다'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가 베어다 놓았는지 바로 앞에 가시가 다닥다닥 붙은 아카시아 나뭇가지가 놓여 있었다. 상우는 번개같이 날려 그것을 걷어잡았다. 동시에 사정없이 명수의 머리를 내리쳤다.
"이 술장사 새끼. 오늘 너 죽었어. 죽어라 죽어……"
상우는 전신에 닭살이 돋는 전율을 느끼며 감히 골목대장을 두들겨댔다. 얼마나 때렸는지 그 애 얼굴은 물론 손발에까지 가시가 박히고 피가 흘렀다. 골목대장은 얼굴을 기리고 엎드러져 앙앙 울며 엄마! 엄마! 하고 죽는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상우는 그치지 않고 갈겨댔다. 주위의 아이들은 겁이 나서 떨고 있기도 했고 담이 큰 녀석은 주먹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상우가 때릴 때마다 더 때리라는 손짓을 했다. 모두가 그 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내리칠 때마다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엎어져 피를 흘리던 명수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안 그럴 게, 안 그럴 게."
상우는 눈을 부릅뜨고 다짐을 받았다.
"너 다른 애들도 괴롭히면 안돼 알았지?"
"알았어."
"느이 엄마한테 안 이를 거지?"
"안, 안 이를게."
상우는 팔을 번쩍 올리면서 소리쳤다.
"한번 더 맞을래?"
"아아아니야, 살려줘."
명수는 자지러졌다.
*15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맞아야 해, 이 새끼."
"살려 주세유."
상우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갈겨 주고 사색이 되어 우는 놈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녀석은 종이호랑이였다. 아무 힘도 못 쓰고 부들부들 떨면서 애원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 인마, 너 앞으로 내 앞에서 까불면 죽어. 알았지?"
"아, 아 알았어."
놈은 비틀걸음으로 돌아갔다. 둘러서서 바라보던 아이들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 상우를 바라보며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얼굴들이었다. 그 애들은 이제 상우가 두려워진 거였다. 상우는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명수 놈이 또 까불면 죽여버릴 거야. 누구든지 그 애가 때리거든 나한테 말해."
"……"
"다 집에 가."
아이들은 해산 명령을 받고 우루루 돌아갔다. 상우는 이제 큰 일이 벌어질 것을 생각했다. 명수 엄마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은 물론 아버지도 가만 계시지 않을 것이다. 상우는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어 안고 벽장 속으로 숨었다.
안에서 걸어 잠그고 반시간쯤 지났을 무렵 상우 집에는 큰 일이 벌어졌다. 명수 엄마가 아들을 끌고 들어와 다 죽게 된 아이 살려내라는 것이었다.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아버지도 오셨고 어머니도 오셨다. 명수 엄마는 집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러댔고 상우 아버지는 빌기 바빴다. 상우 어머니도 원망하는 소리를 하셨다.
"미련한 놈,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려 그래."
"그 놈이 사람이야, 짐승이야, 어쩌자고 이렇게 개죽음을 만들어 놓을 수가 있어어, 어엉엉엉."
*16
명수 엄마는 털썩 주저앉아 큰소리로 울어댔다. 상우 아버지의 화난 소리가 들렸다.
"이놈의 자식 들어오기만 해 봐라.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고 말 테다. 그런데 이 자식이 어딜 갔어."
"내 아들 살려내요. 우리 아들 죽어요. 이 얼굴 좀 봐요, 내 자식이 무얼 잘못해서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아요. 불쌍한 내 자식 으흐으응 으흐으응"
명수 엄마는 큰소리로 울어댔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구경을 했다.
"아니, 명수가 이렇게 맞은 거 아녀. 골목 대장 명수를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대여?"
옆집 아저씨의 음성이었다.
"아따, 명수도 매 맞을 때가 있는가벼."
앞집 전라도 아줌마의 비아냥거림이 곁든 소리였다.
"누구 우리 애 본 사람 없수. 이 놈을 찾으면 당장에 요절을 내야겠는데 이 놈이 어디로 달아난 거여."
상우 아버지의 화난 음성이었다.
"아이들 싸움에 무얼 그렇게 역정을 내세요. 아이들이란 다 싸우면서 크는 거예요."
영등포댁의 음성이었다.
"뭐여?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 불난 집에 부채질이야?"
명수 엄마의 소리가 칼로 베어내듯 차갑게 울렸다.
"죽을 일도 많네. 아이들이 좀 싸웠다고 죽으면 세상에 살아 남을 사람 몇이나 있을까."
"너 서방 잘 뒀다고 유세냐?"
"이 마당에 서방 얘기는 왜 나와. 이 집 애가 얼마나 얌전한 앤데 명수를 때렸겠수. 명수가 맞을 짓을 해서 그랬겠지. 때린 놈만 나무라지 말고 맞은 놈도 무얼 잘못해서 맞았는지 알아보세요."
*17
"무엇이 어째?"
이때 곁에 섰던 고리라 아주머니가 가로막았다.
"명수 엄마. 생각해 봐요. 당신부터 행동거지를 잘 가지고 살아야 해요. 자기 자식 잘못은 모르고 남의 자식 욕만 할 건 아니에요. 명수가 이 동네를 휩쓸고 다니면서 아이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기나 해요?"
"무얼 그렇게 괴롭혔어요? 봤어요?"
"봤지. 동네 아이들 명수한테 안 맞은 애 있나 물어봐요. 이집 애가 오죽했으면 그랬겠어. 잘 맞았지. 맞아도 싸."
동네 아주머니들은 모두 상우 편이었다. 모두들 한 마디씩 했다. 명수 엄마는 사면초가였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더 열을 내고 상우를 감싸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명수네가 이 동네로 이사 온 뒤로는 날마다 명수네 집에 가서 술에 취해 돌아오는 남편에 대한 불만의 표시며 명수 엄마에게 퍼부어 주고 싶은 한풀이가 이런 기회를 타고 터져 나온 것이었다.
명수 엄마는 화가 잔뜩 나서 소리치며 돌아갔다.
"자식 똑바로 가르쳐요. 내가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이놈을 길에서라도 만나면 가만 두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요."
동네 사람들에게 왕따가 된 명수 엄마는 돌아갔다. 남아 있던 아주머니들은 제각기 한 마디씩 해댔다.
"아이 속 시원해. 오랫만에 가뭄에 소나기 맞은 기분이지 뭐유. 가슴이 탁 터지는 것만 같네… 잘했어. 더 맞아도 싼 놈이었어.'
하지만 상우 아버지는 달랐다. 방에 들어와서도 노여움이 안 풀린 듯,
"이 놈이 어딜 간 거여. 독한 놈. 어떻게 그렇게 때려."
*18
어머니가 한마디했다.
"좀 심하게 때리긴 한 것 같은데 명수가 맞을 짓을 했겠지. 가만히 있는 애를 그렇게 때릴 애는 아니잖수?"
"미련한 놈이여. 때려도 적당히 때려야지. 내 이놈 들어오면 가만 두지 않을 거여."
어머니는 고소하다는 듯 아버지에게 못을 박았다.
"잘됐지 뭐유. 당신 이제부터는 그 집 문턱에도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말여유."
아버지는 화가 난 소리로 맞받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는 거여. 내 체면이 뭐여."
"잘 했지. 날마다 맞고 다니는 것보다는 우리 애가 모처럼 골목대장을 때렸다니 나는 괜히 기분이 좋습디다."
"미련한 여편네. 그러다가 애가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여."
"죽도록 때릴 아이는 아니지유."
"답답한 여편네. 술이나 가져와."
상우 아버지는 화를 푸느라 막걸리 몇 대접을 들이켜고 누워 코를 곯았다. 어머니는 자리에 앉은 채 자취를 감춘 아들이 염려되어 중얼거렸다.
"이 애가 어딜 간 거여. 배고플 텐데. 오지 않고……"
아버지가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사이 상우는 벽장문을 살그머니 열면서 가만히 말했다.
"엄마, 나야!"
"거기 있었니?"
역시 나직이 말하며 아들이 내려오는 것을 본 어머니는 밖으로 데리고 나와 상을 차려주었다.
"왜 그랬니?"
"아무 것도 아니여."
*19
상우는 말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소문을 어른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소문도 오래 가지 못하고 어른들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동네 엄마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랭이댁이 동네 사람 다 버려놓는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가랭이 새끼들이 아이들마저 버려놓겠다며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집집마다 부부 싸움이 벌어지고 가랭이년이 하루라도 빨리 여기를 떠나지 않으면 아이에게도 안 좋다고 들고 일어나 명수네는 동네서 쫓겨나게 되었다.
명수는 길에서 상우만 보면 가랑이가 찢어져라 달아나고 명지는 상우가 두려워 자기네 집 골목을 나오지 못했다. 골목에는 새로운 군주 상우가 장악하면서 평화가 왔다.
아이들은 아무도 어른들의 일은 알지 못했다.
명수가 마을에서 쫓겨가던 날, 서산은 저녁놀이 진하게 하늘을 태우고 있었다. 그들 가족 넷은 등에 지고 어깨에 메고 노을 속 멀리 길을 떠났다.
상우는 문득 경찰관 앞에서 주정하는 여자, 오십 년 전 노을 속으로 떠난 하얀 피부에 곱게 딴 머리를 찰랑거리며 우쭐우쭐 걷다가 겁먹은 눈으로 자기를 빤히 바라보던 명지가 시간을 껑충 넘어 어느 순간에 전혀 딴 사람으로 자기 앞에 앉은 모습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비록 헤어질 때는 그렇게 헤어졌지만 지금은 추억과 함께 보고 싶던 옛 동무였다.
그러나 과거라는 인연을 지금 말할 수 있을까. 외면하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상우는 어느 편도 들 수 없었다.
경우는 운전사가 맞는데 운전사 편에서 말하면 명지가 사지로 빠질 것이고 명지 편을 들자니 운전사가 가만있을 리 없다. 과거라는 인연, 지워지지 않는 추억.
가랭이 딸은 결국 가랭이로 그렇게 험하게 살아 온 거다. 상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파출소 문을 나섰다. 뒤에서는 여자의 주정하는 소리가 따라 나오고 유순한 운전사는 나직한 소리로 사건 전말을 진술한다.
길에는 언제나처럼 바쁜 차들이 달리고 추억을 잃은 사람들은 거리를 가며 새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玉皇上帝와 閻羅大王
심 혁 창
(도서출판 한글 대표)
사무실 앞 육교를 건너면 계단 아래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장사를 한다. 할머니가 얼마나 늙고 쪼그라들었는지 그 앉은 모습이 비둘기 같다.
'저 비둘기 노인은 어디서 오셨을까?'
지나다니며 그렇게 생각하다가 들여다보니 노인이 팔고 있는 상품(?)은 세 가지뿐이다. 파 다듬은 것 한 묶음, 곱게 빗어 묶은 부추 두 단, 그리고 비듬나물 한 무더기.
"할머니, 이거 얼마예요?" 부추를 들고 물었다. "한 단에 천 원만 주우." "이것은요?" "그 쪽파는 이천 원이우." "이 나물은요?" "천 원에 다 가져가구류." "모두 얼마치나 되나요?" "그렇게 많이 사시려우 남정네가?" "왜요? 다 사면 안 되나요?" "그렇게 많이 사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유." "그럼 모두 오천 원어치네요?" "그렇지유." "그거 다 제가 사드릴까요?"
햇볕에 얼굴이 까맣게 탄 노인은 믿어도 되느냐는 듯 바라본다. 참 오랜 세월 고생하고 살아오신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눈빛은 유순하고 티없이 맑았다. 볼을 타고 흐르는 선은 색시 적에 고왔던 모습이다. 말에도 때가 묻지 않은 자연스런 노인네 고향 말씨고 얼굴이 그렇다.
"여기 오천 원 있어요. 싸주세요." "아이구, 고마워라. 오늘은 횡재했네." "그렇게 좋으세요?" "좋지유, 이 더위에 이거 다 팔자면 해가 져야 하는데유." "하루 종일 걸려야 다 파시나요?" "다 팔기라도 하면 괜찮지유, 못 팔면 이걸 들구 돌아가려면 올 때보다 몇 배나 무거운 걸유." "그러시겠지요." "그런데 이 고마운 신세를 어떻게 갚지유?" "거저 주신 것도 아닌데 무슨 신세입니까? 정 그러시다면 신세 갚는 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어떻게요?" "이 세상 다 살고 가실 때는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죽으면 염라대왕님께 가는 거지유." "왜 하필이면 염라대왕한테 가십니까? 더 좋은 데를 두고요." "다들 그러대유. 죽으면 염라대왕한테 가서 세상에서 지은 죄를 심판받는다구유." "할머니, 염라대왕한테 가는 건 지옥으로 갈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에요. 처음부터 염라대왕한테 가실 생각은 하지 마셔야지요. 세상에서 이렇게 고생을 하고 사셨는데 죽어서까지 염라대왕을 찾아가 벌을 받으시겠습니까? 죽어서라도 영화를 누리셔야지요. 할머니는 염라대왕 소리밖에 못 들으셨습니까?" "다들 그러니께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살지유." "염라대왕 말고 누구를 또 만난다는 말은 못 들으셨나요?" "옥황상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 같은 늙은이가 어떻게 옥황상제님을 뵙는대유?"
할머니는 죽으면 당연히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또 옥황상제에 대하여도 알고는 있지만 그 분 앞에 가는 것은 일찍이 포기했다는 말이다. 옥황상제가 누군가? 하나님이다. 도교(道敎)에서도 하나님을 일러 그렇게 부른다. 중국성경에는 하나님을 상제라 하였다. 어째서 할머니는 옥황상제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돌아가시면 천당으로 가셔야지 왜 지옥대왕한테 가실 생각을 하세요?" "나 같은 게 이 세상에서도 이렇게 사는데 무슨 수로 천당 가길 바란대유." "할머니, 오늘 신세 갚겠다고 하셨지요?" "야, 고맙구먼유." "신세를 갚고 싶으시면 이제부터는 염라대왕한테 가실 생각을 버리시고 옥황상제님한테 가시겠다고 생각을 바꾸세요." "그게 내 맘대로 되남유." "제가 가르쳐드리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어떻게유?" "교회에 가 보셨습니까?" "교회유? 바뻐서 그런 데는 갈 새가 없구먼유." "세상에서 아무리 바빠도 옥황상제님께 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어요? 지옥에 가기 싫으시면 꼭 한 번 가 보세요." "글쎄유, 교회도 다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 데지유 뭐." "교회는 부자 가난한 사람 따지지 않아요. 죽으면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땅에 묻히듯이 교회는 죽어서 옥황상제한테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는 곳이지요. 염라대왕한테 가시기 싫으면 꼭 교회에 나가세요." "글쎄유."
노인은 천당이고 지옥이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다 팔아치운 것만 좋아서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비둘기 등같이 낮고 구부정한 허리로 길모퉁이를 돌아간다.
겨우 5천 원을 들고 저렇게 온 세상이나 얻은 듯 만족해한다. 어떤 공무원은 5천 원을 몇 장이나 포개놓아야 되는지도 모를 만큼 큰 공금을 꿀꺽하고도 아무것도 먹은 것 없다고 시치미를 떼고 산다지 않던가. 또 나랏돈으로 사업하는 어떤 재벌 아들들은 하룻밤에도 수백만 원을 유흥비로 쓴다는 기사도 읽어본 적이 있다. 그들에게 5천 원은 어떤 의미의 액수일까. 그들에게 5천원은 셈하다가 끝전에도 못 들어가는 돈이 아닌가. 부자가 조금만 베풀면 없는 노인 만 명이 웃으리라.
그 5천 원을 벌자고 하루종일 땡볕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던 할머니, 그리고 5천 원을 쥐고 횡재했다며 좋아하시던 할머니, 무슨 말로 더 위로해 드릴 수 있을까. 그분에게 하늘나라 이야기는 너무 사치스러운 말 잔치였을까?
그래도 할머니 가슴에는 내 말이 씨가 되어 언젠가 한번쯤 신세를 갚겠다고 교회를 꼭 나가 보시겠지.
땅속으로 보낸 편지
선생님께서 편지를 한아름 안고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엄마한테 이 편지를 갖다 드리세요. 엄마가 보시고 나면 이 봉투를 주실 거예요. 그러면 그대로 가지고 내일 학교로 오세요. 알았죠?"
"네."
선생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하나씩 봉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수나도 받았습니다. 봉투마다 꼭꼭 봉하여 내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수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이 주신 봉투를 엄마에게 드렸습니다. 엄마는 봉투를 뜯어보신 후에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수나는 언제나 엄마가 그렇게 웃으실 때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 무슨 편지예요?"
"응, 좋은 말씀이다. 답장은 내일 아침에 해드릴 테니 가지고 가서 선생님께 드리도록 해라."
이튿날 아침 엄마는 하얀 봉투를 정성껏 싸서 봉하고 수나에게 주었습니다. 봉투 속에는 무엇인가 이상한 것이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모두 봉투를 가지고 나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두들 엄마가 주신 편지를 가지고 왔지요?"
"네에!"
"그럼 편지를 들고 모두 나와요."
선생님은 교실을 나서셨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줄을 서서 걸었습니다. 모두들 이상하지? 하는 눈으로 서로 바라보면서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선생님은 넓고 길게 손질된 화단으로 가셨습니다.
화단에는 어느새 여러 개의 호미와 학생들의 이름이 예쁘게 씌어 있는 작은 명패 팻말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화단 앞으로 나란히 세우신 다음 팻말을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그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자기 이름이 적힌 팻말을 받으셨지요?"
"네에."
"이제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선생님은 맨 앞에 아이에게 호미를 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잘 보아 두세요. 여기 미나가 가지고 온 편지를 화단에다 묻겠어요. 이렇게 적당한 깊이를 파고 편지를 묻는 거예요."
미나가 호미로 땅을 파고 흙 속에다 가지고 온 편지를 묻었습니다. 그 아이를 따라 다른 아이들도 땅을 파고 각자가 가지고 온 편지를 묻고 그 자리에다 자기 명패를 꼽았습니다.
모두가 편지를 땅에 묻은 다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즐거웠지요? 오늘 여러분은 엄마가 주신 편지를 땅에다 부친 거예요. 이제 기쁜 소식이 여러분에게 올 거예요. 어떤 소식이 오게 되는지 며칠만 있으면 알게 돼요. 앞으로는 이 화단을 잘 가꾸어야 해요. 알았죠?"
아이들은 무슨 답장이 올까 하여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수나도 많이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편지 봉투에 무슨 답을 넣었어요?"
"그게 그렇게도 궁금하냐?"
"네, 엄마."
"며칠만 있으면 알게 된단다."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가르쳐주면 재미가 없어. 조금만 기다려보려무나."
수나는 많이 궁금했지만 참고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궁금하여 엄마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대답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에 비가 내렸습니다. 한 아이가 화단으로 나가서 자기 이름이 있는 곳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귀여운 싹들이 파랗게 웃으며 두 손바닥을 벌리고 기지개를 펴듯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신기하다는 듯 큰소리로 알렸습니다.
"얘들아, 나와 봐! 화단에 나와 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제각기 자기 이름이 있는 곳으로 가서 화단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여기저기 화단에는 파란 새싹들이 고개를 들고 인사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가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웃고 신기해했습니다.
수나도 자기 이름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새싹이 돋아났는데 수나의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수나는 실망하여 아무 말도 없이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한테 불만스럽게 말했습니다.
"엄마, 난 뭐야, 뭐냐구?"
"그게 무슨 소리냐? 뭐가 뭐야?"
"다른 애들은 다 편지 답장이 왔는데 나만은 아무 소식도 없잖아."
"음, 그거 말이냐? 아마 네 것은 다른 애들 것보다 훨씬 늦게 대답을 할 거야.
"그게 뭔데요?"
"그 대답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 선생님이 비밀로 하라고 하셨거든."
이튿날 학교에 갔을 때 다른 아이들은 화단을 떠나지 못하고 자기 이름 앞에서 새로 소복이 돋아나는 새싹을 보면서 깔깔거렸습니다. 미나가 수나에게 다가왔습니다.
"수나야, 넌 무슨 싹이 돋았니?"
"아직 안 나왔어, 넌?"
"몰라, 아기손 같은 새싹들이 와글와글 돋아나고 있어."
"그러니? 어디 한번 가보자."
미나 자리로 가 보았습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야들하고 귀여운 떡잎들이 서로 어깨를 비비며 기어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의 것은 떡잎이 넓적하고 어떤 아이의 것은 뾰족뾰족한 것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것들은 땅바닥에 붙어서 기어다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남 모르게 훌쩍 자란 것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모자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것들은 두꺼운 껍질을 들쓰고 두 떡잎으로 힘껏 밀어 올리고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화단 가득히 새싹들이 돋아나 제각기 어깨를 펴고 하늘을 향해 노래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은 제각기 자기 떡잎을 보면서 그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아시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모두 자기가 보낸 편지에 답장이 왔지요?"
"네."
"아직도 소식이 없는 사람 있나요?"
"네."
수나가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렇지만 더 기다려 보면 소식이 올 거예요. 궁금하다고 땅속에 보낸 편지를 다시 열어보면 안 돼요. 알았지요?"
"네."
몇 밤이 지났습니다. 아이들은 제각기 새싹들이 무슨 꽃인지 궁금하여 선생님께 여쭈어 보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화단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맨 끝에서부터 하나씩 들여다보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싹은 봉숭아 같다. 그리고 이 싹은 분꽃, 이 싹은 코스모스, 이 싹은……"
다 둘러보니 같은 것들도 있고 저 혼자인 것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자기 꽃이 아름답게 피어날 것을 생각하면서 꽃 꿈에 빠졌습니다. 봉숭아꽃이 필 것을 생각하는 아이들은 벌써 손톱에 빨간 봉숭아물이 들어 있기라도 한 듯 들떠 있고 그것이 부러운 아이는 자기에게도 봉숭아꽃을 물들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화단에 돋아난 새싹들이 긴 목을 내밀고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자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수나의 소식은 아직도 없었습니다.
다들 자기 꽃이 더 예쁠 것이라고 자랑들을 하는데 수나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남들은 화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가서 들여다보고 물도 뿌려줍니다. 그러나 수나는 풀이 죽어서 화단에도 가기 싫었습니다. 화단만 보면 짜증이 나려고 합니다.
그렇게 몇 날을 더 보내고 난 어느 날 미나가 달려와 알려주었습니다.
"수나야, 너 소식 왔어, 가봐!"
"그래? 뭐 나왔어?"
수나는 반갑고 기뻐서 화단으로 달려갔습니다. 화단 수나 이름 아래에는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이 보였습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굵고 빨갛고 힘이 차 보이는 새싹이 물도 주지 않아 딱딱하게 굳은 땅을 뚫고 힘차게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문학방 >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냉이가 시집간대요 (0) | 2008.05.05 |
---|---|
하루를 사는 값 (0) | 2008.05.05 |
하나님 엄마하고 아빠하고 쌈이 났어요 (0) | 2008.05.03 |
어린 통역사 (0) | 2008.05.03 |
투명구두 1-114 (0) | 2008.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