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시

슬픈 날개

웃는곰 2008. 5. 3. 21:12
 

슬픈 날개

길에서 키가 채송화처럼 납작하고

주름살로 오그라든 할머니가

길을 물었다

쪼그라든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가

목소리보다 컸다


허리를 숙이고 내려다보며 대답하자니

키가 훤칠한 미인 배우가 나타나

물었다


이 분이 누구신지 아세요?

다시 들여다보았지만 전혀 모르는 얼굴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이 분은 왕년의 유명한 영화 배우

ㅂ씨예요


ㅂ씨가?

아니 ㅂ씨가 이렇게 생길 수도?

나는 주저앉고 싶었다

그 천사처럼 아름답던 영화배우가

이렇게 세월의 버림을 받다니!


어느 날인가

공원 돌담 밑에 낙엽 사이로

한 조각 화려한 나비 날개가

바람에 굴러가는 것을 보았다


부스럭거리는 낙엽

볼품 없는 찢기고 말린 낙엽이

교양 없이 히히덕거리며

이리저리 미친년 몸짓으로 구르고


아름다운 나비 날개 쪼가리는

다리를 절며 끌려 다녔다

젊은 나비의 화려한 무도회

꽃들을 희롱하던 세월은 다 빼앗긴 추억


차라리 더 부서져서

사라지지 못하고

창녀 같은 낙엽이 가는 대로

거역을 모르고 그렇게 가는 것을 보며

아름다운 것은 늙을 때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살다

죽을 때는

보는 이 없는 곳에

혼자 잠들 때

영원히 아름다운 것이라고

아름다운 것은 숨어야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한


그 공원에 뒹굴던 화려한 나비 날개가

오그라든 여배우의 어깨 위에

슬프게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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