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게시판/사는이야기

10000원

웃는곰 2007. 12. 3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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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합정역에서 영등포구청역까지 가는 길이었다.

내 옆 빈자리에 한 신사가 앉으면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여기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앉으십시오.”

인상이 아주 점잖고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잠시 후 그가 말을 걸었다.

 

“여기서 교대역까지는 멉니까?”

“한참 가셔야 합니다.”

“저는 강릉에서 왔습니다. 길이 많이 변하여 어리둥절합니다. 선생님은 강릉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십여 년 전에 한 번 가 보았습니다.”

 

“저는 공직에 있다가 정년을 하고 경포대에서 모텔을 경영합니다.”

“좋은 곳에 사시는군요.”

“강릉 오시면 한번 오십시오. 저는 장로입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편리를 많이 보아드립니다.”

 

“저는 갈 일이 별로 없습니다. 강릉은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온 곳이지요. 특히 문단에는 황금찬 같은 시인이 있고요.”

“그렇습니다. 황선생님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은사님이십니다. 신봉승씨도 저하고는 잘 아는 사이입니다.”

“그렇습니까.”

 

이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내가 내리는 정거장에 도착했다. 내가 내리자 그분이 따라 내렸다. 그리고 명함이 없다면서 종이에다 자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말했다.

“제가 서울 올라오는 차를 타고 왔다가 지갑과 돈이 든 작은 가방을 두고 내렸습니다. 버스회사에 찾아 달라고 해 놓고 나니 돈이 달랑 5천원밖에 없습니다. 제가 강릉 가서 갚아드릴 테니 15만원만 꾸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당황했다. 이 사람이 누군 줄 알고 그런 돈을 꾸어준단 말인가. 마침 현금은 만원밖에 없어서 지갑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있으면 꾸어 드리고 싶은데 보시다시피 만원밖에 없습니다. 당장에 돈이 없으면 얼마나 불안하시겠습니까. 이것이라도 드릴 테니 받으십시오. 저는 길이 바빠서 더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강릉에 오시면 꼭 찾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나는 길을 재촉하면서 내가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생각하다가 그가 사기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의 말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겨우 그 생각만 하고 바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가 선한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래야 내가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주소는 모르고 강릉 경포대 sun motel이다.

전화는 033-646-2850, 2890

이름은 이경선

 

강릉이라고 쓴 한자나 모텔 이름 영문이 모두 달필이었다. 인상이나 글씨로 보아서는 사기꾼 같지 않아 마음이 놓이나 빈자리에 앉으면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앉은 것이 마음에 좀 찜찜하다. 실은 인사하는 그의 자세가 우리 모두 해야 할 예의인데 그것이 왜 나를 찜찜하게 만드는 것일까.

 

돈 만원이 나를 어지럽혀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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