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게시판/출판인생 40년

(5) 윤선생 교정법

웃는곰 2007. 10. 16. 15:20

출판인생 40년 (5)/ 윤선생 교정법

윤 선생은 남원에서 태어나 대만 사범대학에 유학하여 중국어를 잘 하는 사람으로 나보다는 위였다.(후에 조선대학 교수가 됨)

 

한번은 교정지가 밀려 집필자들도 교정을 도우라고 각자에게 30쪽씩 교정지를 나누어 주었다. 나는 나대로 내 몫을 다 했고 다음날 정판을 마친 재교지가 나왔다.

활판 인쇄시절이라 책은 인쇄소에서 먼저 채자(문선)를 하고 조판부로 가면 조판공들이 달가닥 딸가닥 소리를 내며 판을 짠다. 행간은 인테르로 채우고 띄어쓰기는 공목으로 채운다.

 

그 다음 과정이 스리를 낸다는 말을 쓰는 교정용 인쇄하기이고 출판사에서는 그것을 보고 맞춤법 띄어쓰기를 바로 잡는다. 그리고 다시 인쇄소로 가면 정판공(사시가에)들이 교정지를 따라가며 교정자가 지시한 대로 활자를 바꾸어 넣는다.

 

윤선생은 교정 부호를 모르고 있었다.

다행히 그 교정지가 나한테 왔다. 나는 재교지를 받아들고 깜짝 놀랐다.

 

한 페이지 속에 ‘가’라는 글자가 틀렸으면 다른 자리를 둘러보아 ‘가’자가 있으면 그 가에 동그라미를 치고 줄을 주욱 그어다 틀린 자와 연결시켰고, 어떤 곳은 ●표 어떤 곳은 ◇표, 그리고 어디는 ▲표 등을 바꾸어 놓았다.  교정지 30쪽이 모두 ▲△□◆◇◎●로 가득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윤선생께 조용히 물었다.

“교정을 어떻게 보신 겁니까? 이게 다 무슨 표지요?”

윤선생은 맨 앞장 위에 범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가리켰다.

“여기 범례가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 

 

내가 입을 못 열자 그는 어이없게도 변명을 국제적으로  했다.

“중국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교정부호는 국제 부호처럼 된 것이 따로 있습니다. 선생님이 만들어 놓은 범례를 언제 공부하여 정판공들이 다 고칩니까.”

 

“한국은 이상하네요. ▲은 ‘도’자라는 표시이교 ■은 관자, □은 덕자, ○은 길자 이렇게 하는 겁니다.”

나는 기가 차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됩니다. 이제 제가 가르쳐 드리는 대로 교정 부호를 익히고 그렇게 하세요.”

나는 아무도 모르게 그에게 교정부호를 가르쳐 주었고 그 교정 지 30쪽은 인쇄소에 비밀리에 양해를 구하고 다시 조판하여 고쳐 주었다.

 

그는 글은 써도 교정은 본 일이 없었던 거다. 공부는 제대로 한 사람이 겨우 교정부호를 몰라 혼자 범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 놓고 얼마나 힘들게 고생을 했을까.

 

교정부호를 배우고 난 그는 나를 좋아하였고 나도 그를 형처럼 가까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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