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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잎

웃는곰 2025. 1. 13. 18:54

가랑잎

 

사납게 불어대는 늦가을바람에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던 갈잎이 떨어져 이리저리 바람에 끌려 다니다 한 곳에 멈췄습니다.

가지를 떠난 가랑잎은 한겨울 펑펑 내린 눈 속에 덮인 채 발발 떨며 겨울을 보냈습니다.

 

마침내 긴 겨울이 지나고 따듯한 봄이 왔습니다. 겨우내 소복하게 덮였던 눈이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가랑잎도 따듯한 햇볕을 받아 기지개를 켜고 소리쳤습니다.

아아! 봄이다. !”

이때 땅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영차! 영차!”

가랑잎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땅에 떡잎이 흙을 밀고 올라오면서 내는 소리였습니다. 가랑잎이 잎 대를 쑥 내밀어 떡잎을 도와주었습니다.

떡잎이 흙을 밀고 나와 팔을 벌리고 하품을 하다가 가랑잎

이 한쪽 흙을 밀어내며 도와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가랑잎이 두리번거리며 할아버지가 어디 있나 찾다가 막 피어난 아기 떡잎한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라니 어디 할아버지가 있느냐?”

떡잎이 고개를 들고 가랑잎을 향해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모르는 척하세요?”

뭐라고? 내가 할아버지라고?”

, 할아버지 고마워요.”

허허, 이 녀석 내가 왜 할아버지냐?”

할아버지 맞아요.”

어디가 할아버지냐?”

할아버지, 얼굴을 보면 알아요.”

내 얼굴이 어때서?”

할아버지 얼굴에는 주근깨가 까맣게 나고 검버섯이 여기저기 나 있고 등에는 구멍도 있고 이빨이 빠져서 소리도 늙은 소리를 내시잖아요?”

허허, 내가 그러하냐?”

할아버지는 그것도 모르셨어요?”

그랬구나. 나도 한때는 너같이 예쁜 새순이었는데…….”

떡잎이 목을 더 뽑아 올리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더 고마운 것도 있어요.”

무엇이 그리 고마우냐?”

할아버지가 나를 겨울 동안 덮고 계셔서 춥지 않게 지냈거든요. 헤헤헤.”

그러냐?”

. 그리고요. 제가 땅을 힘들게 밀고 올라올 때 한쪽 흙을 치워주시지 않았나요?”

허허 그것도 아느냐?”

,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늙으셨어요?”

나도 새싹 때는 너처럼 예뻤었다.”

떡잎이 목을 더 길게 끌어올리며 궁금한 것을 물었습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예요. 언제 그렇게 늙었어요?”

그게 궁금하냐? 나도 세상에 새 움으로 태어날 때는…….”

새 움이 뭐예요?”

새 움이란 나뭇가지에서 나오는 새싹을 새 움이라 하고 너처럼 땅에서 떡잎으로 세상에 돋는 것을 새싹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도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예쁘다고 했어요?”

,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봄 손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움이 토실토실하고 예쁘다고 했단다. 그러나 봄이 지나고 여름 한

때는 이렇게 넓적하고 싱싱하게 가지에 달려 바람이 불면 부채질을 하여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 주고 더운 날은 해를 가리고 그늘을 내려 사람들이 우리 잎들 아래서 땀을 닦고 쉬게 했었다. 그러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되어 온 산을 빨갛고 노랗게 물들여 놓았다. 빨갛게 물이 든 나를 사람들은 꽃보다 예쁘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잎은 따가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아주 멋졌나 봐요.”

멋졌지. 그런데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가지에 붙은 잎들이 모두 단풍이 되었다가 떨어져 나무는 가지만 남았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되신 거예요?”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할아버지 이름이 있어요?”

이름…….”

이때 산비탈 아래서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가랑잎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떡잎을 감싸 덮으며 말했다.

조용히 해라. 사람이다.”

사람이 뭐예요?”

너한테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이다. 저 사람들은 산나물을 캐러 온 사람들인데 너같이 야들한 새싹과 나물을 만나면 당장 뜯어간다.”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래 매우 무섭다. 사람들은 너 같은 도라지를 좋아한다.”

제가 도라지예요?”

그래, 너는 늙은 도라지라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 만약 저 사람이 너를 보면 뿌리째 뽑아간다. 그래서 내가 너를 숨겨주는 것이다.”

제가 늙은 도라지라고요?”

그래, 넌 십년도 넘은 늙은 도라지다. 너 같은 도라지는 약초라고 좋아서 뿌리까지 뽑아간다.”

할아버지 보호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렇게 하여 사람들이 못 보도록 보호해 주고 며칠을 지냈을 때 토끼가 나타났습니다.

할아버지, 저 하얀 것도 사람인가요?”

저건 사람이 아니라 너한테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토끼라는 동물이다. 너같이 파란 새싹을 뜯어먹으려고 찾는 것이다.”

가랑잎이 도라지를 토끼가 사라질 때까지 덮어주었습니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이제부터 너는 키가 자라고 잎이 무성해지면 더 위험해진다. 산에는 토끼 말고 염소도 있고 멧돼지도 있고 노루도 있단다. 그것들은 모두 너 같은 풀을 뜯어먹으려고 찾아다닌다.”

할아버지 무서워서 어떡해요?”

 

봄이 지나자 떡잎이 자라서 굵은 밑동을 세운 채 겁에 질려 가랑잎 속으로 머리를 박고 발발 떨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물을 캐러 몇 번씩 지나갔습니다. 그때마다 가랑잎은 도라지를 품으로 안아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바로 옆으로 지가가면서 말했습니다.

작년에 이 근처에서 도라지를 보았는데 아직 안 나왔나 보네. 누가 캐갔나?”

사람들이 산 위로 올라가고 조용해지자 가랑잎이 안았다가 풀어주며 말했습니다.

다행이다. 저 사람은 여기 네가 있는 것을 알았던 것 같구나. 그들이 멀리 갔으니 허리를 펴라.”

도라지가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다가 얼굴을 내밀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고마워할 거 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안 무서워요?”

무섭지, 나도 지난봄에 사람들이 올까 봐 겁을 먹었다.”

왜요?”

넌 나물 캐러 온 사람이 문제지만 난 나무꾼이 무섭단다.”

나무꾼이 뭐예요?”

나무꾼은 나뭇잎을 긁어가는 사람들이다. 나 같은 가랑잎을 아주 좋아하고 우리를 갈퀴로 긁어간다.”

할아버지를 왜 긁어가요?”

나무와 나뭇잎을 불로 태워 밥을 짓기도 하고 온돌방을 데우기도 한단다.”

이때 뿔이 나고 수염까지 달린 염소가 나타났습니다. 가랑잎이 급히 도라지를 덮어씌우며 속삭였습니다.

염소가 타나났다. 저것들은 풀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뜯어 먹는다.”

가랑잎 속에 허리를 숙인 도라지가 물었습니다.

염소가 그렇게 무서운가요?”

염소뿐이 아니다. 산토끼 멧돼지 등 무서운 동물이 한둘이 아니다.”

할아버지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 없다. 내가 너를 이렇게 감싸고 지켜주면 동물들이 너를 찾아내지 못한다.”

염소가 풀을 찾아 돌아다니다 떠났습니다. 가랑잎이 도라지를 품에서 풀어주었습니다. 도라지는 무럭무럭 자라서 꽃봉오리를 달고 가랑잎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저는 이렇게 컸는데 할아버지는 안 크시나요?”

나는 더 이상 클 수도 없지만 더 살지도 못한다.”

그럼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시나요?”

나는 네가 잘 자란 것만 보아도 기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도라지 봉오리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저 힘이 빠지고 배가 고파요.”

가랑잎이 도라지 밑동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네가 꽃을 피우자면 양분이 더 필요하겠다. 오늘 밤 비가 내리면 내가 네 뿌리로 들어가 양분이 되어 주마.”

할아버지가 제 뿌리로 들어가신다고요?”

그래, 비가 내리면 내가 너를 안고 비를 맞을 게다.”

그러시면 안 되어요.”

세상에 살아있는 것들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두 늙어 죽으면 땅으로 들어가 너와 같은 식물들의 양분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땅으로 들어가요?”

비에 흠씬 젖어 이 몸뚱이를 네 밑동에 대고 누우면 나는 물이 스며드는 대로 흙속으로 빨려 들어가 네 양분이 된다.”

그러시면 안 되어요. 싫어요.”

힘이 없고 배가 고프다고 했지? 양분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다. 내가 바로 네가 힘을 내고 꽃을 피울 수 있는 양분이 되어 주어야 한다.”

할아버지, 그래도 싫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비가 흠뻑 내리고 가랑잎은 녹아서 땅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잠깐 사이 가랑잎의 살은 사라지고 앙상한 뼈줄기만 남았습니다.

도라지는 가랑잎 줄기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고마워요…….”

뿌리에 내린 가랑잎은 도라지가 아름다운 꽃을 피우도록 영양분이 되어 주었습니다.

할아버지 양분을 받은 도라지는 싱싱하고 아름다운 하얀 별꽃으로 피어 여름이 가고 잎이 질 때까지 할아버지를 부르며 감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 땅에서는 동물과 식물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태어나고 죽으면서 먹혀주고 먹어주며 삽니다. 풀이 나무이고 사람이 식물이고 식물이 동물입니다. 가랑잎은 도라지가 되고 도라지는 사람들이 먹고 사람들은 죽으면 흙으로 들어가 나무나 풀들의 양분이 됩니다. 그래서 식물이 동물이고 동물이 식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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