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집

내가 나를 모르는 바보

웃는곰 2007. 6. 2. 20:53
 

마을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에서 혼자 웃은 일 한 토막

 

모든 좌석이 다 차서 빈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허리가 굽은 백발 할머니 한 분이 가까스로 차에 올라 앞에서부터 좌석 등받이를 짚으며 힘든 모습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맨 앞에 고등학생쯤 보이는 처녀가 핸드폰을 바쁘게 찍으면서 옆을 엉금엉금 스치고 지나가는 할머니를 모른 체했다. 바로 뒤에 40이 못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있었는데 할머니를 보자 급히 눈을 감고 조는 척하고 할머니가 지나가도록 숨을 죽이고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젊은 사람들이 모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척했다. 내가 그것을 보다가 안타가워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할머니 이리 와 앉으세요.”

할머니 말씀.

 

"아이구 노인께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냥 앉아 계시지요."

나는 할머니가 날 보고 노인이라고 한 말에 그만 크게 실망.

내가 나를 노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백발 할머니가 날 보고 노인이라고 하다니!

 

나는 충격을 받은 채 태연히 자리를 내드리며 말했다.

"저는 아직 70이 안 되었습니다."

할머니 말씀.

"무슨 띠이신데요? 저는 말띠(66세)인데요."

 

나는 또 놀랐다. 나보다 아래 할머니라는 것에!

그 할머니가 나를 노인이라고 한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내 나이를 댈 수 없었을까.

할머니가 자기 띠를 댔으니 나도 대야 할 텐데 차마 제대로 못 대고 얼결에 한 대답.

 

"저는 돼지띠입니다."

“그러시면 예순 하나, 올해 환갑이시우?”

내가 환갑이라니? 내가 환갑 넘은 지가 몇 년인데? 하다가 또 어물쩡한 대답.

 

“네, 네”

“아이그, 나이보다 늙어 보이시네. 그 가방이나 이리 내주시지요,”

주변의 젊은 남자 여자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다가 할머니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가볍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 가방에는 책이 여덟 권이 들어 있어서 아주 무거웠다. 그것을 노인에게 주면 노인이 무릎으로 받칠 것 같지 않아 그대로 들고 있었다. 

할머니 말씀.

 

“늙은이들이 타면 젊은 사람이 일어나야 하는 건데 노인이 일어서시다니……”

“젊은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가는 중이라 모두 피곤해서 그럴 겁니다.”

이 말을 내가 왜 해야 하나 하고 이런 생각에 잠겼다.

 

‘늙으면 죽어야 해. 자리를 양보하지 못하고 앉아서 이 꼴을 보는 젊은이들이 말은 못해도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까. 늙은이가 죽지 않으려면 자가용을 타고 다니든지 집에 박혀 있어야 해.’

 

사실 나도 놀다가 돌아가는 길은 아니다. 하루 종일 원고를 읽고, 손님을 만나고, 전화를 받고, 출판 진도 상황을 점검해야 하고, 장부 점검을 해야 하고, 입출고 계산서를 정리해야 하고, 책 출고를 확인해야 하고, 카페도 네 개나 둘러보고 아는 사람 블로그, 카페에도 가서 기웃거려야 하고, 틈내어 동화도 써야 하고, 수시로 소속 회에 참석해야 하고, 내 일과가 날마다 이렇게 짜여 있는데 퇴근하는 길이 어찌 젊은이들만큼 피로하지 않겠는가.

 

나보다 젊은 할머니를 만나 자리를 양보하고 노인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으니 나는 자신을 모르는 바보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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