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창작 동기
한동안 오해하고 지내던 친구의 마음조가리 다 기억은 못해도
이런 문구들이 내 가슴에 충격을 주었다.
순금 달빛 후박나무 잎사귀에 쏟아지는 은빛 종소리
달빛을 밟고 오는 청보리 빛 발자국 소리
하얗게 삭아 내리는 기다림의 단단한 뼈대 하나
햇살 물레 곱게 자아 잎맥 따라 금빛 언어 촘촘히 수놓았네
내 모든 것 다 주어도 사랑은 늘상 배고프고 목마른 것
저만큼 붉은 옷자락 휘날리며 떠나는 가을, 뒷모습이 아름답다
풀들이 하는 말, '꽃이 아닌 게 다행이다.' 풀로 태어나 춤을 추며 가장 낮은 곳에서 언제나 자유롭다.
젖은 꿈 널기 위해 새들은 새벽잠을 깨치며 비상을 시작한다.
가슴 한쪽 반다지에 곱게 말린 추억들을 개켜 넣고
오백 년 시공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은실 같은 수염 곱게 쓸어 내리는 곳, 윗대 어른들이 도포자락 펄럭이며 마주 걸어오시는
그가 남긴 시는 내 가슴에 쌓아 놓은 미움의 성을 무너뜨렸다. 나는 그 몇 수의 시에 감동되어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1. 가을 강
가을 강 깊이 하늘 내리고
강물은 구름 위를
버선발로 흐른다
강심에 돛단배
거꾸로 서서 졸고
물속에 내려앉은 산
단풍을 빤다
고향 가는 이백 리
물속으로 사백 리
서강에 노을 깔고
귀향길 낸다.
2. 숨어 오는 계절
아무렇게나 가도
갈 길인데
어찌 준비만 하다
마는가
눈
하얗게 내린 밤
세월을 구워
한잔 술에 마신다.
3. 술 한 잔 마신 죄
토속주 한잔
변명 한잔
추억 잔에 마신 죄
옛날 배고픈 시절
술지개미 몰래 먹고
허기 채우다
단풍보다 빨간 얼굴
숨기던 추억
향긋한 토속주에
입술을 더럽히고
믿음으로 심판하는
십자가에 찔린
부끄러움.
4. 분재
사랑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가지 줄기 비틀어
난쟁이로 앉히고
묶고 꼬고
자르고
배배 꼬인 팔
허리 꼬여
우는데
춤춘다 하네.
5. 춘래 불사춘
겨울은 발가벗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못 떠난다
못 떠난다
윙윙거리고
속옷만 걸친 봄
달력 몇 장 넘기다
한여름에 쫓기고
더위에 쫓긴 여름
속옷마저 벗어 놓고
떠난 자리
단풍 고운 가을
뜰아래 깜박 졸다
겨울에 밀리고
꽁꽁 언 겨울
양지 고양이 등에
봄꿈을 꾼다.
6. 별을 따는 사람
별을 따다
물에 담그고 앉아
가슴 열고 얄밉게 웃는 여자
숨어서 웃는 미련한 남자
바위를 구름에 싣고
미친 것들과 어울려
썩은 끈을 매어 놓고
시시덕거리는 바보들
벗겨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가슴속 비밀.
7. 눈금 없는 자를 들고
지구 둘레를 재는 현자
그의 자에는 눈금이 없다
내 어깨 위에는
구형 컴퓨터가 있고
나를 비웃는 자들은
글자 없는 키보드만 두드린다
해를 가리고
계절을 밀어내는
너
내가 싫어하는 너
내가 보낸 이메일을 아는가.
8. 초록 웃음
초록빛 아침
나서면 불어치는 흙바람
바람에 얼룩져도
삶은 포기될 수 없는 것
억지 미소
빛바랜 헌 옷 너풀거림
질긴 생명
흙바람 속에
그래도 기도로 부활하는
초록빛 웃음.
9. 솔바람에 묻어오는 다산 숨소리
살아서도 가르칠 것이 없는 우리에게
무덤에 누워서도 가르치는 스승이 있어
이 땅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
두물머리 강가에 흘러내린 산자락
천년 솔바람이 가을 해와 노는 언덕
수만의 발길에 닳아 바닥이 반질반질
실학의 체계를 완성하신 대학자
과학자며 시인이신 다산 정약용
한 해에 우국 애민 백여 편씩 시를 쓰고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시가 아닌 시는
시가 아니라 하신 말씀 가슴에 옹이진다
묘당 길목 기둥마다 남긴 말씀 목민심서
가슴을 열고 담아 안고 마음 판에 새긴다
1762년 야산 밑에 태어나
1836년 75세로 갈 때까지
정조왕 총애와 영광도 누렸지만
하나님 믿은 죄로 유배됐다 돌아와
오백여 편 남긴 저서 후세인 훈계
고향집 뒷산에 석양 타고 누운 다산.
10. 사랑은 증오보다 아픈 것
배신에 깨진 상처
얼마나 꿰매야
찢긴 아픔 기워질까
증오의 한 마디
얼마나 가슴을 앓고
짜내는 파열인가
차라리 바보가 되어
그냥 사랑하리라
11. 단풍. 2
병든 얼굴
화장하고
떠나는 단풍
파란 영화 다 내놓고
잎마다
꽃 춤추는
고운 뒷모습.
12. 추억마저 빼앗기고
잃어버린 사랑은
얼룩으로 남아
세탁도 못한다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그리움 아프기 전에
지웠으리라
13. 엄마
엄마는
몸을 짜 담는
젖통이다
가
엄마는
오줌 받는
오줌통이다
가
엄마는
짜증 담는
울화통이다
가
엄마는
껍데기로 누운
신경통이다
가
엄마는
그림자로 남는
눈물 통이다.
14. 얼굴
화장품 가게 점원
꽃처럼 앉아
피부만 찾는 천사
사망보험 설계사
죽어서 보자는
저승사자
착한 시인
배고픈 주머니
그래도 웃음으로 가득
시계방 주인
시계 잠들기 기다리는
착한 심술쟁이
구둣방 영감
남의 발굽 보다
허리 굽은 곱사등.
15. 보름달
팔월 보름달 떡 찧던
토끼 어디가고
술잔에 임 그리던
이태백도 떠나 갔다
계수나무 가지 높이
가슴마다 뜨던 달
아이들 노래도
우주인이 데려갔다
모깃불 연기 타고
구름 위로 흐르던 달
보름마다 꿈 떠오다
로켓 맞아 죽었나.
16. 사랑의 고백
사랑의 강요를
거부 못하는 나
억지 사랑은 싫다
신의 이름으로 강요당한 사랑
대답은 부드럽지만
마음 바닥은
어둠이다
수박 사랑
사과 사랑
겉포장은 곱지만
투실한 토마토 사랑
그립다.
17 거짓말 사랑
원수도 사랑하리
다짐하지만
사랑을
죽음하고
바꾸자 하면
귀 막고 돌아설 바리새인
원수까지 사랑할 사랑은 없다.
18. 새가 노래하는 건
새가 오래하는 건
하늘을 가졌기 때문이다
새가 행복한 건
나뭇가지가 기다려 주기 때문이다
새가 뽐낼 수 있는 건
높은 산이 날개 아래 엎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픈 새도 있다
조롱에 하늘을 빼앗기고
자유를 달라고 부르짖어도
우는 소리를 노래로 듣는 사람들 때문이다.
19. 여자가 나오는 건
여의도 공원
물소리 새소리
숲 그림
연못
잠든 수면
구름 한 조각 떠가다
내린 그림
나비 한 마리
꿀 찾다 떠난 자리
별 같은 벌레들
꽃 속 파고들고
명찰도 달지 않은 꽃
이름도 곱다
꽃보다
고운 사람이라면
벌레가 되어라도
꽃 속에 안기리라.
20. 꽃들아 사랑해
봄이 날개를 펴고 따듯한 입김으로 대지를 녹일 때 화분 하나에서는 살이 포동한 파란 떡잎이 손을 내밀었고 또 한 화분에서는 빨간 새싹이 동그랗게 오므린 손을 호호 불며 쏘옥 내밀더니 봄이 포근히 개나리 꽃잎을 퍼다가 뿌릴 때 파란 손은 난초로 이름표를 달았고 빨간 새순은 함박꽃 이름표를 달았다. 얼굴이 다른 난과 함박꽃은 아침저녁 이슬로 목욕하며 난초는 굵고 탐스런 꽃대를 세워 높이 고개를 들고 두 팔을 쫙 벌려 브이 자로 꽃봉오리로 빅토리, 함박꽃도 파란 잎으로 겹겹이 치마를 두르더니 줄기 높이 깃대 세우고 동그란 봉오리 깃봉을 달았다. 봄은 날마다 입김으로 꽃봉오리를 호호 불어 파랗게 여민 껍데기를 벗기더니 곱게 접은 빨간 속잎을 풀어 벙그려 놓았다. 함박꽃은 빨간 입술을 벌리고 노란 꽃술을 내밀고 나비를 부르는 동안 브이자 난도 나팔을 불며 빨간 입을 벌리고 노란 술을 저으며 봄노래를 시작했다. 꽃들은 내가 출근하며 들여다보는 아침마다 활짝 입 벌려 뽀뽀를 하잔다. 가만히 입술을 꽃잎에 맞추고 쌉싸롬한 향기에 코를 문지르면 간지럽다고 호호 웃는 꽃들의 재잘거림. 닷새 동안 화려한 얼굴로 마음껏 노래하고 나비를 부르더니 어느새 싱그런 꽃잎에 그늘이 드렸다. 아직 봄이 많이 남았는데 벌써 자려고? 가만히 묻는 말에 수줍은 꽃들은 젊음 잃은 얼굴로 꽃잎을 늘어뜨린다. 안 돼, 더 활짝 피고 더 아름답게 놀아야 해, 퇴근하여 보자. 해질 녘 돌아왔을 때 꽃들은 화장기 잃은 노인 같은 얼굴에 슬픈 눈으로 나를 향해 손을 젓는다. 안녕! 안녕! 꽃들의 화려한 잔치는 너무 짧았다. 너무너무 짧아짧아.
21. 천사
바이올린 천사
노래를 어깨에 걸고
꿈을 타는 손
가녀린 선율 영혼에 스미는
무지개
명주실 가는 음률
영혼을 도려내어
죄 검은 허물
하얗게 색칠한다.
22. 소라
소라는 죽어서도 노래를 한다
봄에는 기쁜 소리로
가을에는 슬픈 소리로
뱅글뱅글 꼬리 끝까지 살을 채우고
월세 살던 나그네 떠난
빈껍데기
고독을 못 이기고 바람 따라 울다가
백화점 진열대에
호적수로 부웅 뿌.
* 노트 : 백화점 진열장에 갇혀 바다를 그리는 소라 껍데기를 보면 모래사장 아득히 발자국 사이로 추억은 바다로 숨고 소라가 부르는 노래는 진열대 유리창에 그림을 그린다.
23. 길
나무숲 지나 언덕 넘고
모퉁이 돌아
누군가 기다릴 듯한
하늘이 내려앉은 아득한 길 끝에
아직 못 본 행복이
그리움으로
아득한 길 끝에 숨었다
파란 하늘 너머
그 사람들은
행복이 여기 사는 줄 알겠지
행복은 길 끝 아닌
발에 밟혀 있는 것.
24. 겨울나무
언 땅에 다리 묻은
겨울나무
가지에 달 걸어놓고
금식 기도중
달은 가지 끝에
얼굴을 받치고
역사책을 읽는다
나무 아래
하얀 지팡이 장님이 가고
한 다리 짧은 노인
자 벌레 걸음이다.
25.그건 은혜
장님은 눈감은 은혜로
죄 없이
하늘로 가고
절름발이는
욕심 없이
하늘로 가고
정치인은 거짓말
잔치 열고
목매어 죽고
부자는
돈에 눈멀어
지옥에 빠져 죽었다.
26. 달
도도한 밝은 달
본대로 들은 대로
책장에
역사를 기록한다.
27. 계단
아현동 지하철
이층 계단
얄따란 외투에 머리 처박고
찌그러진 양은 냄비
새까만 손 달달
구걸하는 아이
계단 입구 가운데
시주함 앞에
털목도리 두툼한 두루마기
폭신한 모자로 귀까지 덮은
스님 하나
목탁을 친다
딱 따르르 딱딱
딱 따르르 딱딱
목탁 소리 천 근 무게
구걸하는 아이 머리에
우박처럼 떨어지고
아이 거지는 보상 없이
구걸을 하고
스님은 복을 빌며
손을 내민다
시주함엔 지폐가
줄래줄래 들어가고
일그러진 양푼엔
동전 몇 잎
쟁그렁
우는 소리
스님은 불룩한 시주함 메고
거지 아이 앞
곁눈 한 번 안 주고
도도하게 지나갔다.
28. 날개
공원 돌담 낙엽 사이
떨어진 나비 날개 하나
수다스런 낙엽에 묻혀
희롱 당했다
화려한 무도회 수놓고
꽃들을 희롱하던 화려한 날개
삶도 추억도 세월에 빼앗긴 날개
부서져 사라지지 못한 채
창녀 같은 낙엽에 휩쓸려
거역을 모르고 끌려가는 날개
공원에 화려한 날개
오그라든 여배우 어깨 위에
슬프게 내려앉았다.
29. 떠내려가기
강물에 떠가는 나뭇잎처럼
세월이 가는 대로 흘러가리라
봄이면 꽃 찾아 꽃 따라 웃고
여름이면 바람 물 따라 가리
가을밤 낙엽 소리에 시를 밟고
겨울엔 눈사람 볼에 웃음 달아 주리라
초대하지 않은 번뇌는 뿌리쳐도 떠나지 않고
어쩌다 들른 행운은 머무는 듯 떠난다
30. 가을이 가자 하네
가을은 낙엽을 두고
외로운 길
쓸쓸히 돌아가고
불타던 태양은
남은 추억을
가죽부대에 긁어 담는다
나는 머물려 해도
시간이
추억으로 데려간다
가을은 땅에 묻어둔 것들과
가지에 걸었던 것들을
두고
떠날 채비에 바쁘다
가기 싫다 몸부림쳐도
가을은 나를
낙엽에 메고
겨울로 가자 한다.
28. 어둠 깨는 종소리
눈을 떠도 캄캄한 새까만 한밤
별들은 호수에 내려 졸고
창문마다 잠이 들어 불이 꺼졌다
그 새벽 어둠을 깨는 소리
땡그렁 땡
땡그렁 땡
산 너머 죽은 영혼
물 건너 잠든 영혼
일어나 눈을 떠라
땡그렁 땡
땡그렁 땡
육신은 죽음에 맡기고
영혼은 구원과 동행하라
땡그렁 땡
땡그렁 땡
땡그르르 르르르
잔잔한 수면으로
녹아드는 종소리.
* 오랜만에 장마가 끝난 날 햇빛 같은 소식이었소. 그렇게 즐거운 휴가를 보냈다니. 축하하오. 마음에 있는 짐은 가슴 밖으로 털어내고 환한 기분으로 사시구려 고민해도 당할 일이라면 고민하지 말고 긍정적이고 기분 좋은 감정을 가지고 그 문제와 당당히 부딪치기를.
31. 인생
바람은 구름을 몰고 다니고
강물은 바다를 밀고 흐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남남으로 태어나
달처럼 일그러지고 살다
갈 때는 빈손으로
혼자 간다.
32. 파먹기
덩굴은 나무를 파먹고 살고
나무는 지구를 파먹고 산다
벌벌 떨며
잡아먹을 것을 찾는 짐승들
구름도 떠난 빈 하늘 아래
들꽃으로 돋아
길모퉁이에 홀로 앉은 나.
33. 소유
세월은 가죽을 말리고
속병 앓는 인심
빛 잃은 추억만 아득
소용없는
소유를 위해
상실을 거부하는 인생
34. 가는 세월에
누가 나를
세월의 강에서 건져
이 끝에서 세월 끝으로
데려 가려나
세월이 버린 고아
욕심을 못다 채운
빈 가슴에
달력만 넘어간다.
35. 가슴 끝까지 사랑을
그대 가슴 열고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무엇으로 찼다가
무엇으로 비우는가
그대 가슴 깊은 끝
마음 바닥 거기
나 그대의 주인이고 싶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가슴에 성을 쌓고
나만 사는 주인이고 싶다.
36. 그대를 위하여
그대 슬플 때
눈물 되고
그대 웃을 때
꽃이 되어
나 그대의 시가 되리라
내 마음 하얗게 씻어
천사의 날개로
정갈하게
나 그대의 침실이 되리라
37. 그대 꽃물 든 향기로 오라
마음에 묻은 마음
바람 옷 입고 흔들리는
시집 표지 같은
너
시 하나
지어놓고
하루 종일
물그림자로 흔들리는 마음
마음은 마음으로
몸을 묶지만
몸으로
마음 묶지 못한 안타까움
노을이 시간을 깔고
강 끝에 잠길 때
맨살로 부딪쳐 멍이 들어도
그대 꽃물 든 향기로 오라.
38. 진한 즙으로
들꽃
가을 해 내린 들녘
아무나 보고 웃는 들꽃
눈빛 낚아 마음에 담고
혼자인 양
속는 마음
바람은 들꽃 흔들어
내 마음에 꽃길 내고
들꽃 그리움이
질투로 웅크린다.
39. 달
마음으로 뜨는 달은
철없이 곱다
달은
멀리 구름 타고 흐르고
잃어버린 과거는
눈물로 멍든다
정으로 꿰매 놓고
달 따라 떠난 사람
가슴엔 실밥이 서리서리 쌓인다.
4.. 돼 지
돼지
무거운 돌 하나 지고
고름 집으로 돌아간다
고름 집 무너지고
수만 년 흐른 자리
고름도 돼지도 흙으로 하나 되고
공간은 시간을 삼키고
시간은 존재를 삼키고
존재는 공간을 삼키고
남은 건 망각뿐.
41. 딸 낳은 아픔
여름에 못 믿을 건 일기예보
바람 부는 날이면
누구는 압구정동으로 간다지만
나는 바람 타고
추억으로 간다
딸 낳은 아픔
넷째 딸이 태어난 날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고맙기만 하였다
딸 낳은 아픔은
시집간 딸들이 산실에서
몸 푸는 날
애잔한 소리로
우는 고통이
더 아팠다.
42. 상생
먼 산이 다가와
들려주는 말
가슴은 오수로 썩어가고
머리는 독가스로 두통을 앓고 있소
나를 살려 주오
나도 당신 살리겠소
문명은 염병보다 무섭게 번지고
달리는 자동차 내뿜는 공장 연기
요부의 웃음 같은 문명의 유혹
문명은 바이러스
달콤한 독약
먼 산이 돌아앉아
중얼거린다
나를 살려 주오
나도 당신 살리겠소.
43. 눈물의 빛깔
눈물을 모르는 사람은
모르리라
하얀 눈
까맣게 타
결정체 잃는 아픔을
영혼 깊은 곳
눈보다 진한 사랑
남몰래 숨긴 뜻을
눈물은 노래보다
아름다운 빛깔이지만
그것이 속 깊은 아픔인 것을
44. 가슴으로 하는 말
오늘은 지는 꽃
추억으로 떠나고
내일은 꽃씨 되어
꿈으로 다시 오리
눈 내리듯
나긋한 그대 목소리
닿지 않는 거리에 멀리 그립네
가슴으로 하는 말
마음 창 열어둔
그대는 알리
눈은 쌓여 무너져도
첩첩 쌓인 그리움
무너질 줄 모르리
45. 가지 마오
눈길 하얀
꿈을 따라
추억으로 가는
그대
가는 듯 숨은 듯
돌아오소서.
46. 가을을 밟으며
가을은 떠나간 사람이 그리운 계절
한 잎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지으며
추억으로 가는 하루를 보낸다
잃어버린 세월 주름살에 새겨두고
스치는 바람에도 상실이 싫어
시간을 꿰매 놓고 돌아눕는다
그리운 얼굴은 언제나 늙지 않고
그리는 마음만 상처로 늙어
강 그림자 깊은 산을 넘는다.
47. 주제도 순서도 없이
가을 깊은 하늘
마음보다 파란 속으로
나의 기다림은 눈을 뜬다
말하고 바로 잊어버리는
그래도 억울하지 않은
주제도 순서도 없는 이야기
마음껏 웃으면
그로 족한
우리가 아닌가.
48. 젊은 얼굴
코스모스가 아직은 젊은 얼굴로
기다리는 들길로
꽃들의 노래가 흘러가고
들길에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얼굴로
저만큼 서서 웃으며 오는
벗이여
사랑하는 이여
나 약속 없는 그대를
거기서 기다리리라.
49. 문득 생각나는 사람
은행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흩날리면
문득
그리운 사람이 추억에서 돌아와
옆에 앉는다
가까이 얼굴 대고 귀 기울여
웃음으로 얼굴 섞으면
잊었던 그리움이
옷을 벗는다.
50. 목련
눈 속에
소복으로 갈아입고
서둘러 먼저 온 목련
달보다 환히
뜰 밝히는 은빛 웃음
그리움으로
지는 모습
소복 차림으로
하얀 꽃잎을 받들고
순간 처연한 자태로
가만히 웃고 지는 목련.
51. 꿈길의 벤치에는
밤 3시, 나는 꿈길에서 만나기로 한 여인을
여의공원 호수가 벤치에서 기다렸다
호수에는 별들이 내려 목욕을 하고
말간 눈동자를 반짝이며 볼록한 가슴을
가리고 수줍게 웃었다
나는 벤치에 누워 혼자 뜬 별을 보았다
너는 왜 내려오지 않았지?
별은 대답 대신 눈물만 똑 떨어뜨렸다
기다리는 여인은 오지 않고
벤치에는 졸다 떨어진 달이 내 어깨에 얹혔다
하얀 달 속에는 남자의 품에 안겨 웃는 여인이
나를 보고 물었다
바보, 내 말을 믿었어요?
당신의 꿈길까지 가기엔 너무 멀어요
기다리지 말아요
아! 나는 속은 것인가!
52. 발소리
빙어 빛 맑은 살결
속내 보일 듯 살폿 숨긴
잠자리치마 아가씨
목련 빛 뽀얀 다리
곧게 흐른
가냘픈 선
구름 가듯 가벼운 걸음
샌달 밑에 묻어나는
발자국 소리
딱딱딱 짝짝작
껌 씹는 소리.
53. 8월
하나님은 하늘에
구름 빨아 하얗게
걸어 말리고
울창한 나무 숲
매미들 합창
바람 소리 물소리
빨갛게 타는 8월
발가벗은 아이들 깔깔 소리
점벙점벙
세월의 강을 건넌다.
54. 진달래
진달래 분홍 산길
소월이 넘던 길
짝사랑 소녀는 새신랑 밥 짓는데
소월은 아직도 가슴으로 운다
한용운이 다리를 절며
울며 넘던 길
문둥이는 아이를 잡아먹는다고
진달래 꽃 속에 전설을 쓴다
바위 고개 오솔길 못 보낸 순정
그리움은 진달래로 다시 피는데
잔인한 사월은 핏빛 꽃잎 접어
오월로 간다.
55. 구겨진 시간
씹다 버린 청춘은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속으로 가고
비에 젖은 시간은
구겨져 이력서 쓸 자리도 잃었다
비 오고 눈내리는
초가지붕에
해가 얹혀
슬프게 떨고
서럽게 서럽게
때 묻은 시간을 저미다가
벗지 못한 무게를 등에 업고
다리를 절며 간다.
56. 아침 화단
가지마다 치렁치렁
고개 숙여 조는
분꽃
하루 종일 졸다가
해질녘에 눈비비고
화장을 한다
누구를 만나려나
떠난 임 돌아오기
기다리는가.
밤새도록 화사한 웃음
해 뜨면 눈을 감고
다시 조는
분꽃.
57. 나이가 들면
철학은 누가 가르쳐 주어 얻는 학문이 아닌 것은
철학은 인간 영혼 속에서 나오는 샘이 굳어
만들어지는 것
인생 70에 잃는 연습 부족하면
70넘어 부린 과욕 득보다
실이 많다
인생 70이면 무형 재산이 소중하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짧다
무엇을 남길까 고뇌할 나이다.
58. 유방
유방은
꽃으로 가린
부끄러움이다
가
유방은
입술에 타는
불꽃이다
가
유방은
몸을 태우는
정렬이다
가
유방은
자식이 빨다 버린
빈껍데기.
59. 秋 園
앉은뱅이 채송화
주저앉아
방실방실
키다리 해바라기
허리 숙이고
벙글벙글
한들한들 코스모스
슬픈 목 가냘프게
파란 입술
생끗생끗
밤마다 단장하고
임 기다린 분꽃
웃음 잃은 가슴이
까맣게 탔다.
60. 아기 풀꽃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파란 허공
하나님의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절대 고요를 밟고
별로 떴다 지는 이름 없는 아기 풀꽃
민들레 노래에 아무도 귀 열지 않는 고요한 오후
고양이 한 마리 거울 앞에 앉아 깜박 졸고
가녀린 수염 끝에 매달린 고요
돌 틈에 작은 생명 하나 일어나 시를 쓴다
구절마다 새 생명의 신비가 쌓이고
고양이 발소리에 깜박 잠에서 깬 꽃눈 하나
가느다란 가지 끝에 파란 눈으로 뜬다
보숭한 버들강아지 움츠린 틈으로 봄눈 녹는 소리
노을은 하루를 태우며 꽃 분홍으로 번지고
노을 타고 아득히 줄지은 기러기
허공을 맴돌던 소망이 꽃이 되어 내리는 날
풀끝마다 작은 별로 꽃대를 세운다
모진 계절의 심술을 이겨내고 수줍게 웃는 풀꽃
혹여 발에 밟힐까
신 벗어 든다.
61. 돈
돈은 언제나 교만하게
내 곁을 지나
부자만 찾아간다
어쩌다
내 종이 되어
내가 쓸 때만
누군가에게 절을 시키고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얄미운 꼬리.
62. 빛나는 이름
황희 정승 높은 어른
비 오는 날 방안에서
우산을 쓰고 지내면서
우산 없는 백성을 염려한
정신
황희 정승 높은 어른
궤짝 속에 갔어도
만백성 추앙받는
위대한 스승
케네디 아내 재클린
선박 왕 마누라로
화려하게 살다
관에 들 때
껍데기로
조소 받은
부끄러운 행적
63. 남에 의해 존재하는 나
외모로
행복 구하는 사람
자기 행복을
남에게 의탁하고
보관하는 것
내 이름이
나는 못 부르고
남한테만 보관되어
불려지듯
나는 남에 의해
살고 있는 존재
64. 사랑을 핥으며
따듯한 목소리
두 손에 담아
가만가만 핥으면
애잔한 에버그린
노래가 들리고
달콤한 목소리
꽃잎으로 안긴다.
65. 향기로운 추억
잃어버린 추억
하나 둘 주워 모아
눈을 감으면
못 떠난 너
백합 향으로 돌아와
품에 안긴다
66. 세월아 쉬어 가자
얼굴에 묻은 세월 지우개로 지워질까
곱던 이마 눈매 깊이 잔주름이 숨었구나
세월아 잠시 쉬어 달빛 타고 놀다 가자
무엇으로 지워낸들 묻은 세월 지워질까
추억만 세월 끝에 가물가물 흔들리네
세월아 내 님 얼굴 곱게곱게 비켜가라
67. 국화가 피는 날 나는 울 거야
파리한 어머니
계단을 기어오르시며
흙 한 줌 담고
병아리 입만큼
작고 노란
국화 싹 한 포기
정성으로 심으시고
국화 싹 한 포기
여름내 자라
어머니 모습처럼
작고 슬픈 얼굴이다
아침저녁 물주며
어머니 마지막 삶이 묻은
잎사귀 파란 숨결 타고
그렇게 가신 어머니
어머니
가신 나라가
국화 향보다
아름다운 나라인가요?
아직도
못다 하신 말씀이
있으실 텐데
어머니는 국화 한 포기에
소망을 묻으시고
홀연히 가셨습니다
남들은 장수가 복이라지만
다 살고 보면
장수만큼 무거운 저주도
없다 하시던
어머님 말씀
진리였습니다
이제 국화는
파란 하늘에 손을 저으며
멀리 떠가는 구름 너머로
가을을 손짓합니다.
국화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기쁜 모습으로
가을을 기다리며
꽃망울 잉태의 꿈에
하얀 밤을 지냅니다
어머니
계실 적
이렇게 손에 흙 묻히고
정성 모아
한 포기 새싹에
늙은 삶을 매어 놓고
다시 피어 날
생명의 집을 지으셨습니다
뜨락에 귀뚜라미
달빛 타고
바느질하는 노래 소리
옛날
배고픈 허리를 안고
햅쌀 나기 기다리던
그 얼굴이
하얀 달빛으로
오시네요.
68. 슬픈 날개
채송화처럼 납작하고
주름살로 오그라든 할머니가
길을 묻는다
쪼그라든 입술 사이로
바람 새는 소리
목소리보다 컸다
언내 하려
허리를 숙여
대답하려니
쭉 빠진 미인 배우 나타나
이 분을 알겠느냐 묻기에이 누구신지 아세요?
잘 보았지만 모르는 얼굴
고개를 가로젓자
이 분은 왕년의 유명한 영화배우
ㅂ씨예요
ㅂ씨가?
아니 ㅂ씨가 이렇게 생길 수도?
나는 주저앉을 뻔했다
그 천사처럼 아름답던 영화배우가
이렇게 세월의 버림을 받다니!
이름 난 사람은 늙으면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
죽을 때는
보는 이 없는 곳에서
혼자 눈감을 때
영원히 아름다우리라.
69. 서랍속의 추억
순금 달빛 후박나무 잎사귀에 쏟아지는 은빛 종소리
바람 안고 요분질치는 보리밭 아득히
그대 다가오는 초록 발소리
뭉게구름 한 자락 베어 깔고
시보다 고운 수를 놓고 가슴
눈 감고 마음 베어 시를 지어도
그대 품에 안겨도 목마른 갈증
일렁이는 청보리 바람을 타고
멀어지는 그대 내 맘을 베어 가네
달빛을 밟고 오는 푸른 발자국 소리
하얗게 삭아 내리는 기다림의 단단한 뼈대 하나
햇살 물레 곱게 자아 잎맥 따라 금빛 언어 촘촘히 수놓았네
내 모든 것 다 주어도 사랑은 늘상 배고프고 목마른 것
저만큼 붉은 옷자락 휘날리며 떠나는 가을, 뒷모습이 아름답다
풀들이 하는 말, '꽃이 아닌 게 다행이다.' 풀로 태어나 춤을 추며 가장 낮은 곳에서 언제나 자유롭다.
젖은 꿈 널기 위해 새들은 새벽잠을 깨치며 비상을 시작한다.
가슴 한쪽 반다지에 곱게 말린 추억들을 개켜 넣고
오백 년 시공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은실 같은 수염 곱게 쓸어 내리는 곳, 윗대 어른들이 도포자락 펄럭이며 마주 걸어오시는
6.25 보릿고개 넘던 배고픈 시절
아줌마들 따라 산속에도 가 봤다
무릇에 풀을 섞어 죽을 끓이고
한 그릇씩 퍼먹고 얼굴이 퉁퉁 부어도
그래도 배고픈 것보다 낫다고
먹던 아줌마들이
이 땅을 일구어 부자 나라 만들었다.
지금은 차를 타고 장에 다닌다
아이들은 전설 같은 보릿고개 이야기
무릇 먹고 부었던 아줌마들 이야기는
못 믿을 거짓말로 듣는다
우리들 어린 시절은
거지 가족이었다.
지금 아이들은
정말 행복한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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