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논픽션

나는 가짜 크리스천이었다

웃는곰 2022. 10. 4. 14:54

나는 가짜 크리스천이었다

머리말

바람둥이는 여자를 꾀자면 공자나 석가모니가 한 말을 써야 한다는 것르 다 안다. 그러나 성경으로는 미녀를 사냥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나는 이라는 젊은 주인공은 미녀 사냥꾼이었다. 그는 미녀들이 많이 모인다는 여자대학교 앞 다방에서 자기는 S대학생이라고 속이고 여자를 꾀었다. 그리고 사기를 치고 도둑질을 했다. 그러나 사기 행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피해자의 고발로 경찰에 잡히고 결국은 유치장까지 갔다.

유치장에서는 여자들이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여자 구경을 하자면 여죄수도 참석한다는 교회에 가면 된다는 것을 알고 그는 거짓말을 하여 자기도 기독교인이라고 속이고 예배에 참석한다.

그런데 목사님이 성경을 읽었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라는 대목에 갑자기 그 말이 자기한테 하는 말로 들렸다. 불경이나 공자의 가르침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죄의 짐을 지고 갇힌 수인이다. 내 죄 짐을 누가 벗겨준다고 했던가? 나는 가짜 크리스천으로 여기 왔고 하나님 앞에서까지 죄를 또 짓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죄를 회개하고 진짜 성도가 되려는 결심을 하고 예배에 성실히 참석하고 봉사하여 3년 만에 모범수가 된다. 법 절차상 마지막 재판을 받아야 하고 감호 13년에 구형 10년을 다 치르고 출감하자면 61세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모범수로 외출도 하고 새 사람이 되어 감형을 받게 되고 유치장 죄수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한다.

내 재주로 산다

예수를 믿지 않던 나는 크리스천이 공연히 미웠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믿음 없이 살던 때는 나와 똑같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무슨 일에건 비위가 틀리면 나는 하늘을 향하여 쑥떡을 먹이며 외쳤습니다.

! 하나님, 정말 있다면 당장에 내 마빡에다 벼락을 쳐봐! 사람들은 예수와 하나님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야! 대답하라, 하늘이여 예수여! 이 세상에 수십 억 인구가 살고 있지만 하나님도 예수도 본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역사책에도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다는 기록이 없단 말이다.”

술이 취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더 미워져서 예수라는 이름에 침을 뱉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왜 그 무능해 빠진 모습으로 세상의 온갖 비웃음을 받고만 있나 말이다. 나 같으면 당장에 벼락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악한 놈은 돈을 많이 벌어서 큰 양옥에 살고 고급 승용차에 첩을 몇씩 거느리고 여행이다 골프다 희희낙락 사는데 예수만 믿고 주여! 주여! 하는 것들은 다 어떻게 살고 있나 보라. 그 사는 꼴들이 꼴이 아니란 말이다. 가난뱅이 예수꾼한테 큰 부자 놈 돈 좀 뭉텅 떼어다가 주는 것만 본다면 나도 믿겠다.”

나는 아무 때나 어디서나 화가 나고 최기가 돌면 하나님을 향해 악담을 수없이 해댔습니다. 그리고 혼자 하나님이 있단 말인가 하고 자문도 해보았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돌리고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은 없다는 확신밖에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직업이 없습니다. 굳이 직업을 말하라 한다면 별 일곱 개에 감방 출입이나 하는 전문 도둑놈입니다. 도둑놈이 무슨 직업입니까. 하지만 내가 벌이가 좋을 때는 일류 직업 못지않게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쓰고 더 잘 놀아났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도둑질로 랭킹 1위의 악명 높은 도둑놈이었습니다. 무려 340대나 되는 ××를 훔쳐 타고 다니다 돈하고 바꾸었으니까요.

제가 별 일곱 개 달던 날 전국 일간지 3면은 온통 이 도둑놈의 기사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나는 별 일곱 개를 달기까지 언제나 하나님을 한두 번씩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극히 불편스럽고 생각하기 싫은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역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듯이 그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왜냐? 내가 340대의 ××를 훔칠 때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내 앞에 나타나 이놈! 무슨 짓이냐!”하고 가로막아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자전거도 아니고 비싼 ××를 한두 대도 아니고 340대나 훔쳐대는 이놈을 그냥 두고 있다니, 하나님의 속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이 눈이 멀어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둑질에 성공하여 돈이 두둑이 주머니에 차면 하늘을 보고 더 비웃어 주었지요.

! 하나님, 예수! 봤어? 알어? 안다면 당장에 내 목을 쳐봐! 내가 도둑질할 때마다 축복이나 하라고! 하하하…….”

나는 하나님이 못마땅하여 욕을 실컷 퍼부어 주고 늘 가는 악의 소굴로 향했습니다. 거기에 가면 나를 기둥서방으로 모시는 계집이 하나 있었고 그 계집은 누구에게나 주머니에 돈이 있는 기색만 보이면 서비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거머리처럼 빨아먹고 돈 떨어지면 토해 버립니다. 나는 그래도 그 계집이 좋아서 돈이 떨어지면 ××를 훔치러 길로 나섰습니다.

서울에는 어디나 ××가 즐비하게 서 있습니다. 주인은 없고 자물쇠로 잠근 채 혼자 있는 것은 백 퍼센트 내 것이 됩니다. 나는 어떤 자물쇠도 풀 수 있고 ××를 모는 기술은 누구도 못 당합니다. 주인이 저만큼에서 알아채고 도둑이야! 하고 외치면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기술이 있습니다. 어디든 타고 가다가 기름이 다 되면 가까이 있는 적당한 곳에 가서 팔아 치웁니다. 돈이 금방 두둑해지지요.

그리고 예쁘고 여우같은 여자를 찾아가 ×× 판돈을 다 주고 며칠이고 같이 살 계약을 하고 그 동안은 마시고 자고 엉망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돈 걱정 없겠다, 예쁜 여자가 24시간 시중들겠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니까 나는 잡히지만 않으면 세상 것이 다 내 것입니다. 또 잡히면 들어가 쉬는 거지요. 나는 한가한 틈만 나면 트집 잡을 건덕지가 없어서 하나님을 상대로 투정을 합니다.

이봐! 하나님, 봤어? 다 이렇게 사는 거야. 죽으면 푹 썩어 없어지는 게 인생이라구. 양심은 무슨 양심, 양심이 밥 먹여 주냐. 나같이 사는 놈이 한두 놈이냐 말야. 다 벼락을 쳐서 죽여라.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란 말이다. 무능한 것들.”

340번 도둑질을 하면서 일곱 번이나 잡혔고 이 여자 저 여자 갈아치우며 뒷골목으로 헤맬 때 꾀인 여자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별 여자 다 유인하여 인심 쓰는 척 접근하다 건드리고 유부녀까지도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을 실컷 농락한 다음에도 하나님을 비웃었습니다.

하나님, 보시오. 내가 ×× 한 대만 가지면 여자 하나를 꾀어내고 내 맘대로 하는 것 알지 않수? 유부녀를 감쪽같이 건드려도 누가 뭐랍디까? 당신이 보고 계시다구요? 정말 당신이 있고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면 어쩌자고 눈을 감고만 계신단 말입니까. 나보다 더 악랄한 놈들도 그냥 두느냐 이겁니다.”

나는 무슨 말로든 하나님을 공격했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마음속에 정리도 하였습니다. 왜 나는 도둑질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라는 상대를 놓고 불평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 내 속에 겨자씨 만한 양심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신도 많고 부처도 많습니다. 절에 가서 절도 해본 내가 왜 죄를 짓고 나면 부처나 다른 신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하나님만 상대로 내 죄와 허물을 가리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교회에 다녀본 경험은 없고 625때 구제품 타는 재미로 교회를 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기도는 해본 일이 없습니다. 절에는 가면 근엄하게 생긴 부처가 두려워서 절을 했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막연한 공격 목표였습니다.

내가 스물일곱 살 때였습니다. 이미 그때는 별이 두서너 개 붙은 뒤였지요.(별은 감방 들어간 숫자를 말함) 모 여대 앞에 가서 대학생처럼 하고 앉아 주머니에 든 돈을 헤아리다가 여학생을 꾀었습니다. 나는 여자를 꾀는 덴 명수입니다. 요새 여학생들은 한문 지식이 약합니다. 그리고 불경이나 유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한문투 용어들을 그럴싸하게 씨부렁거리면 어느 대학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실력 있는 인물로 알고 좋다 합니다. 그것을 안 나는 한자는 제대로 모르면서 논어, 맹자, 불경의 교훈 등에는 빠삭합니다. 귀동냥으로 배운 것을 써먹는 것이지요.

여자를 꼬실 때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경 말씀과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사귀었다가 일이 잘 되려 할 찰나 성경 말씀이나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여자를 벗겨 놓고도 그 말에 둘이 다 불 맞은 기둥처럼 옷을 도로 입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불을 쫙 펴고 쏙 들어가서 논어, 맹자가 어떻고 부처님이 어떻고 하면 그냥 넘어갑니다.

그러나 죄 짓는 대가로 살아온 나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운 존재는 보지도 못한 예수님입니다. 정말 ×맛 다 떨어지는 이름이 예수입니다. 도둑놈들 치고 예수 욕하지 않는 놈은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도둑질하는 동안 예수가 길을 막은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제 재주껏 할 짓 다하고 나서는 예수님 이름만 들리면 불평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대들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도둑질하는 모습을 340번이나 보았을 것이고 내 감방 친구들 중에 별이 열둘이나 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열두 번을 그냥 보고도 못 본 체했단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입니까? 차라리 부처 앞에서 그 모양이라도 보며 절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더 표현할 능력이 없어서 못하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하여 나는 스무 살 적부터 서른여섯이 되도록 부인해 왔습니다. 부모와 조상도 역시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습니다. 불공드리며 살아오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하나님 이야기라면 펄쩍 뛰는 분이었습니다. 내가 죄를 하도 짓고 사니까 어머니는 절에도 가지 않습니다. 불공도 다 허사라는 것이지요. 안 믿던 예수님을 새삼스럽게 믿을 수도 없고, 예수를 믿는 것은 자존심이 깨지는 줄로 생각하는 분들이 우리 부모님이십니다. 언젠가 집에서 형사에게 수갑을 받고 나오던 날 어머니가 노여움을 못 이겨

하나님도 눈이 삐었지,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누굴 잡아가. 저놈을 잡아가면 내가 하나님을 믿지…….”

하고 오열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나는 어떤 나쁜 일을 해도 하나님의 방해나 제지를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따금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있다면 우리 집을 왜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공부도 제대로 못하게 버려두고 가난한 집에서 고생을 하다 이 꼴이 되게 버려둡니까?”

나는 운명이 잘못된 것도 하나님 탓으로 돌렸습니다. 하나님은 내 불만의 상대였습니다. 그러다가 별 여섯 개를 달고 나와 ××를 훔쳐 비싼 값에 팔던 날 딱 한번 하나님께 좋은 값에 팔아주셔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도 나는 돈을 좋을 일에 쓸 줄을 몰랐습니다. 남한테 못할 일 하여 만든 돈을 쓸 때는 여자와 술과 죄짓는 일을 위해 썼습니다. 부모님한테 한 푼도 드린 적 없고 친구를 도와준 적도 없습니다. 오직 나 일신의 즐거움을 위해 썼습니다.

하루는 주머니에 돈이 두둑한데 어디 가서 멋지게 쓸까 궁리 중이었지요. 그때 모 여자 대학 앞에 있는 다방에 가 앉아 있자니 예쁜 여자가 하나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길에 세워둔 ××만 보면 마음에 결정된 뒤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은 내 것을 만들었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부녀만 아니면 다 내 맘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 여자는 바로 내 것이다 하고 찍으면 나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흔해도 내 눈에 쏙 드는 여자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편력이 많은 나는 여자를 보는 눈이 남다릅니다. 그러한 내 앞에 천사처럼 예쁜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볼수록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작품 중에 가장 성공적으로 빚어낸 여자가 저 여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 아름다운 여자는 과연 누구의 소유가 될 것인가 하고 주인이 될 사람을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 청초하고 요염해 보이기까지 하던 모습은 내 머릿속에서 늙지도 않고 생생합니다. 그녀는 그 날 노을빛이 젖어들고 있는 창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갸름하고 뽀얀 피부에 매끄럽게 흐르는 목덜미의 선이 그렇고, 곱고 오뚝한 콧날에 새침한 눈썹이 노을빛을 받아 활짝 핀 꽃처럼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나의 강심장은 그녀의 가슴을 흘러내린 가냘픈 선에 감겨 숨이 멎을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 여자의 어디에 흠이 하나라도 있을까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았습니다. 어느 한곳도 흠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내가 넋을 잃고 있을 때 그녀는 사뿐히 일어섰습니다. 쭉 뻗어 내린 다리의 선이 나를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사뿐사뿐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나는 따라가서 꽉 잡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날 그 여자 생각으로만 밤을 지냈습니다. 그 이튿날입니다. 그 다방에 가 있으면 그녀가 나타날 것만 같이 하릴없이 온종일 기다려 보았지요. 오후 4시쯤이었는데 그녀는 화사한 모습으로 어제와 같이 그 자리에 날개를 접고 앉았습니다. 나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좀처럼 가슴이 뛸 만큼 충격을 받을 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내가 그 여자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그녀를 만나러 오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도 나타나지 않기만 빌고 있다가 그녀가 한참 지루하게 느끼고 있을 때쯤 해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실례합니다. 기다리는 분이 아직도 오지 않나 보지요?”

하고 자리에 함께 앉아도 좋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녀는 상상외로 친절하게 앉기를 허락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거짓말을 시작했습니다.

나도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일로 오지 않아 바람을 맞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보니 아가씨도 만날 사람이 오지 않더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니에요. 저도 심심하고 지루한 중이었으니까요. 어떤 친구 분이신데 약속을 많이 어기시는 것 같군요.”

, 얼마 전에 나와 함께 S대 같은 과에서 공부를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 친구가 있는데 어제 귀국하겠다며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연락도 없고…….”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눈이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S대라고 한 말에 충격을 받은 게 확실했습니다. 여자 치고 S대 대학생이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나같이 겉만 치장하는 멋쟁이 건달이 S대라고 하자 그녀의 관심을 끌기에 족한 것이었지요.

그 날은 둘이 해가 지도록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녀가 기다리는 상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오지 않을 것이 당연했지요. 그러나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도 누군지 몰라도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궁금하여 그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둘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자연스럽게 일식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고 아늑한 밀실로 들어가 마주앉았습니다.

예쁜 여자와 함께 있으려니 공연히 어깨가 으쓱하였는데 종업원 아가씨들도 부러워하는 눈으로 그녀와 나를 곁눈질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최고급으로 대접했지요.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보였습니다. 그 날은 정말 기분 좋은 하루였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나는 멋지게 거짓말을 해 놓았습니다. 나는 S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을 한다고 해놓았습니다. 그래야만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가정 형편에 대해서도 말해 두었지요. 아버지가 인천에서 큰 회사를 운영하고 계신데 사업을 목적으로 어른들끼리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해서 집을 뛰쳐나왔다고 했습니다.

생활비는 어머니가 아버지 모르게 다달이 보내주어 넉넉히 쓰고 있다고 했고 집에는 가지 않을 결심이라고도 해두었습니다. 그 날 우리는 헤어지면서 다음 날 다시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그녀에게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겠다고 농담까지 던졌습니다. 그녀가 보고 싶어서 하룻밤을 거의 뜬눈으로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는 일찍이 목욕하고 이발까지 하고 멋지게 차리고 나갔습니다.

그녀는 약속대로 나왔습니다. 그 날은 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냥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습니다. 빨간 색이 곱게 흘러내린 가슴이며 무릎에 남실거리던 뽀얀 속살, 웃을 때마다 하얀 향기처럼 드러났다가 숨는 가지런한 치열, 그건 보지 않고는 그릴 수 없는 수채화였습니다. 그 날 나는 그녀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그녀의 고향은 서울이고 부모님은 부산에서 큰 공장을 하고 있는 부잣집 둘째 딸이었습니다. 일류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A대학 가정과 4학년이었습니다. 나하고 비교하기엔 너무 어울리지 않는 훌륭한 가정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묻지 않는 사항에 대하여도 말했습니다. 자기와 사귀고 있는 남자도 역시 미국에 유학 중이라는 것과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가겠으니 공항으로 나오지 말고 그 다방에서 기다리라고 하여 나갔지만 바람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바람맞은 그녀 앞에 나타난 나는 그녀의 허탈한 심사를 달래주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 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후 5시에 그 다방에서 만났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우리는 이미 사랑의 늪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나는 날마다 그녀가 만족해 할 만큼 좋은 것을 사주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틀에 한번쯤 ××를 끌고 달아나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하여 쓰는 돈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그 생활도 즐거웠습니다.

그녀는 감쪽같이 속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학교 강의가 있어서 못 만난다고 해놓고 돈 모으기에 바빴지요. 열심히 거두어 나는 어느 깨끗한 양옥 이층에 셋방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가구며 살림도구도 새로 장만했지요. 그녀를 초청하여 보여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6월 더위가 시작될 무렵 우리는 토요일 오후 고속버스를 타고 온양을 갔습니다. 거기서 각자가 목욕을 하고 저녁 식사를 멋지게 한 후 댄스홀에 가서 신나게 놀았지요. 그러다가 서울 차를 놓쳐서 여관에 들게 되었습니다. 나는 점잖게 방 둘을 얻어 각각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굉장한 호감을 보였습니다. 신사답다는 거였지요. 나는 엉뚱한 말을 한 마디 해놓았습니다.

참 좋은 친구였는데……. 전에 내가 바람맞던 날, 미국서 온다던 친구가 그만 비행장엘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까?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 날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순간적이나마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눈가를 스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울로 올라왔고 세월은 흘러 한 여름이 되었습니다. 뜨거운 해가 달아올라 사람들은 모두 해수욕장으로 끌어내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기다렸던 사람을 완전히 잊은 듯 나와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귀동냥으로 들은 논어, 맹자 등등을 엮어가며 역학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녀는 무슨 얘기든 잘 듣고 즐거워했습니다.

돈을 펑펑 쓰며 이 수상한 인간의 비밀을 모르는 순진한 그녀는 그저 내가 부잣집 도령으로만 믿는 것이지요. 바캉스는 우리들을 해변가로 끌어냈습니다. 값비싼 텐트를 사고 간이침대며 취사도구와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바닷가로 갔습니다. 바닷가에서 4일 동안 먹고 마시고 잘 때도 한 텐트에서 잤지만 나는 바닥에 눕고 그녀는 침대에 재웠습니다. 그녀가 이상하게 느낄 정도로 우리는 순수하게 지냈습니다. 4일째 되던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텐트 밖에는 파도만 밀려왔다 돌아가는 물소리뿐, 조용한 그런 밤이었습니다. 그녀가 나를 잡아당기며 가슴을 열었습니다.

제게 비밀이 하나 있었어요. 우리가 떠나던 전날 미국에 있다는 남자친구 소식이 왔었어요.”

그래요?”

그 친구가 그만…….”

그녀는 말끝을 흐렸습니다.

그 친구가 어떻다는 거지요? 무슨 일이라도?”

, 교통사고가 났대요.”

그래요?”

세상을 떠난 거 같아요.”

그 친구 이름이 뭐지요?”

…….”

?”

, 박규철이라고…….”

박규철? 그럼 규철이가 죽었다구요?”

죽었대요. 그런데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요?”

알다마다요. 바로 그게 내가 기다렸다는 그 친구였는데요.”

? 정말 그럴 수가 있을까요?”

친구들을 통하여 전해 오느라고 오래 걸린 거예요. 그때 친구 분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던 그 무렵이었으니까요.”

! 그럴 수가, 그럴 수가.”

그녀는 내가 가슴 아파 지껄이는 줄 천진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나는 내 거짓말이 신기하게 적중하여 무언가 일이 제대로 될 것만 같아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남의 애인이 죽었다는데 내가 좋아하다니, 이놈의 속은 속속들이 도둑놈 맘보로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날 밤 슬퍼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쾌재의 축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술기운 속에 그녀의 입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쉽게 그리고 뜨겁게 입술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밤도 우리는 순결했습니다. 그녀를 위로하며 어쩌면 우리는 운명적으로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잃어버린 남자 친구 대신에 친구의 친구라는 나를 더욱 가깝게 그리고 뜨겁게 사랑해 왔습니다. 그리고 둘이는 약속을 했습니다. 간 사람은 이미 떠났으니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말자고. 대신에 둘은 서로 잃어버린 친구에게 쏟은 사랑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이 후로는 더 이상 그 사나이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 역시 나를 좋아하게 되어서인지 옛날을 까맣게 잊은 듯 나와의 사랑에만 푹 빠졌습니다. 나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주머니에 돈을 두둑이 넣었고 통장에도 백 만 원 이상을 예금해 두었습니다.

언젠가는 그녀에게 보여주어 내가 막강한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해 여름 우리는 인천에 있는 해수욕장을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래밭에 누드로 뒹굴며 태양 욕을 즐기기도 하고 수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선물해 준 고급 선글라스를 끼고 분홍빛 수영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모래사장을 둘이 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올 때 모 영화사의 감독이며 카메라맨이라는 사람이 접근해 왔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쭉 빠진 몸매가 예술적이라면서 영상소설 모델이 되든지 영화로 출연하든지 재고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딱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녀도 거절했습니다. 그 날 해변가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녀의 몸매에 눈길을 주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여자들까지도 저희끼리 소곤소곤 우리 쪽을 가리키며 눈길을 보냈습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수영복 차림으로 하루 종일 뒹굴고 뛰며 즐겁게 놀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내 기쁨의 모두였습니다.

나도 그녀를 저만큼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말라고 해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우유 빛 피부와 백옥 빚듯 흘러 뻗은 전신의 곡선은 살아 있는 예술작품이었습니다. 그녀가 먼바다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을 때 그 아카시아 향이라도 나는 듯 벌린 입술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 아름다운 여자가 나의 것이 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 내 가슴은 기쁨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 날 해가 기울고 어둠이 바다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을 때 나는 그녀의 흩날리는 머리채를 팔 안에 받아 안고 눈감은 하얀 얼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녀는 나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다의 파도가 밀려왔다 돌아갈 때 모래밭을 핥는 그 진한 아쉬움을 꼭 문 채 긴 시간 우리의 뜨거운 키스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희미하게 잠깐 떴다 지는 눈썹 같은 초승달을 바다가 삼킨 뒤에 우리는 한없는 즐거움을 밟고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입술의 선물을 서슴없이 했고 하루도 만나지 않고 못 견디겠다며 내가 사는 집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자취를 한다고 해놓았기 때문에 그녀는 내 생활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녀의 청에 못 이기는 척하고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허름하고 너절해서 보여주기 싫어. 있는 것이라곤 책과 헌 옷가지뿐이니까. 우리의 밀회를 위해 좋은 곳을 하나 마련해 놓을게. 기다려, 일주일 뒤에는 영주와 내가 단둘이만 숨을 수 있는 비둘기 집을 준비할 테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놀란 듯 그렇게 돈이 있어요?” 했습니다. 나는 이미 각본을 짜놓고 그녀를 함정으로 끌고 가는 중이었으나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끌려오고 있었습니다.

영주, 우리를 위한 사람의 비둘기 집을 마련하고 결혼할 때까지 거기서 즐기자. 그러다가 어른들께 승낙 받고 결혼식을 하고. ?”

좋아요. 홍일 씨만 좋으시다면 무슨 일이든지 좋아요.”

이렇게 되어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책이라곤 없습니다. 그녀는 내가 사는 집이 보고 싶다고 했지만 왔다가 책 한 권 없는 것을 안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나는 부천에 있는 초라한 집에 살면서 그녀에겐 혼자 지낸다고 했기 때문에 가짜 대학생이라는 것이 탄로 날까 두려워 새 집을 정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순진한 그녀는 내 말을 무조건 믿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내가 얻어둔 이층집 깨끗한 방에서 비밀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밤마다 만났습니다. 나는 그녀와 한 방에서 잤지만 달콤한 입술만 즐겼을 뿐 그녀의 깊은 곳은 소중히 아끼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녀의 애정은 더 깊었고 가뭄에 비를 기다리는 논바닥처럼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정상적인 사람인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밤 내가 잠든 사이에 확인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부터 그녀는 애를 태우며 나의 욕망에 불을 붙이려 몸부림을 쳤습니다.

사실 나는 그녀의 타는 속보다 더 뜨겁고 폭 넓게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긋하게 견디며 그녀를 온전히 정신적으로 내 아내로 만드는 계획을 진행했습니다. 나는 깊은 사랑에 빠졌고 그녀를 위해서 돈을 더 많이 모아야 했습니다. 내가 그럴수록 ××는 많은 주인을 잃고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와 나는 밤마다 순 나체로 뒹굴며 사랑의 늪에 빠져 입술로 영혼을 불태웠습니다. 그녀는 밤마다 몸살이었습니다. 낮에는 그렇게 얌전하게 보이는 그 깔끔한 여자가 밤을 넘기는 몸부림은 성난 동물 같았습니다. 나는 누드로 애무하며 금욕하는 그 깊은 욕망의 늪에 언제나 머물고 싶었습니다.

가을이 가까운 달 밝은 밤이었습니다. 그녀와 나는 긴 목마름의 터널을 지나 깊고 뜨겁고 황홀한 육체의 결합을 이루었습니다. 나는 창녀 굴에서 별 짓을 다해 가며 살아온 야생 동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그토록 사랑의 문을 끈질기게 닫아 놓고 마음 태워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첫 경험이었고 그 첫 경험이 노련한 나의 테크닉에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불길로 타는 절정의 도가니에 빠져 버둥거렸습니다.

역시 나도 애정 없는 살을 섞던 창녀와의 밤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극한 황홀감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24시간 행복했습니다. 밤도 낮도 없이 안고 뒹굴었고 그 다음엔 밤거리로 어디로든 즐길 수 있는 곳에서 행복을 만끽했습니다.

는 낮에는 ××를 훔쳐 타고 나갔다가 오후엔 태연하게 돈을 세면서 귀가했고 그녀는 요부가 되어 밤을 기다리는 승냥이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낮에 무슨 짓을 하다가 돌아오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갔다가 강의가 끝나면 도서관 등에서 공부를 하고 오는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돈은 고향에서 무한정 쓰는 대로 부쳐주는 줄 알고 그녀는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썼습니다. 그녀는 학교에 언제 갔다가 언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요새는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는 게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지만 그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한 내 심정은 그녀가 학교를 중단하고 집에서 살림만 해주는 여자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학벌과 실력으로 내가 뚝 떨어져서 이따금 자격지심으로 고민스런 일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쯤하고 넘겼습니다.

내 배짱은 그 정도에 당혹해 하거나 껄끄러워할 정도로 허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둑놈 배짱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숨기는 데까지 숨기고 들통나면 뛰고, 잡히면 엮여들어 가는 것이 내 운명이니까요. 아무튼 우리는 꿈속을 헤매는 듯한 달콤한 애정 속에서 1년을 보냈습니다. 그 동안 그녀의 뱃속에는 우리 사랑의 씨가 잉태되었습니다. 배가 나오기 전에 대책을 세운다면 그녀는 휴학 신청을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배가 나올수록 행복했습니다.

이제 이 여자가 내 자식을 하나 낳아놓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는 나의 완전한 아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가지면 그녀의 미모에 반한 사람들이 다 떠나갈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녀는 부잣집 딸이고 좋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기업체를 가진 사람들이 며느리 삼자가 수없이 청혼해 왔습니다. 그때마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를 비밀로 해놓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부모님 청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임신을 하게 되자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고 친구네 집에서 학교에 다니기로 했다고 하고 살림을 완전히 내게로 옮겼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었으며 살림도구까지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임신 기간은 쉽게 지나갔고 그녀는 귀여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기 엄마가 된 그녀는 친정어머니에게만 비밀리에 우리의 사정을 고백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그 날 밤으로 서울에 와 우리를 찾았습니다.

나는 꿈꾸는 생활을 하다가 그녀 어머니를 만나는 순간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직자, 무식자, 도둑놈이 귀한 집 딸을 속였고 품위 있고 점잖은 어른들을 속이고 거짓말 행복의 집을 꾸미고 있다는 자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품위 있고 교양 있는 분이었으며 딸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껍데기가 멀쩡하게 생긴 나를 미워하기보다 대견하게 바라보시며 간단하고 조리 있게 몇 마디 물어보시고는 더 깊이 캐묻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존경스런 분이었습니다.

두 모녀는 나 모르게 무슨 이야기인지 나누었고 부산으로 가셨습니다. 나는 그 날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도둑질을 하고 싶은 생각이 달아났습니다. 점잖은 집안의 딸을 농락해 놓고 도둑질로 밥을 먹이다니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도둑놈도 때가 되면 철이 드나 봅니다. 날마다 귀엽게 자라나는 아기가 나를 보고 세상을 정정당당히 사세요 하는 것 같고 도둑놈 아빠 싫어요 하고 말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는 그녀 모르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낮이면 ××를 노리는 사냥개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가서 당당히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써 가지고 이 공장 저 공장 헤매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전과자라는 것을 알고 채용을 거절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했고 거기엔 내 더러운 과거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번 올라간 그 몇 자가 내 일생 어디를 가도 붙어 다니며 거머리처럼 나를 괴롭힐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디든 들어가 밥벌이 할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자식을 가진 내가 도둑질만 일삼는다는 것은 한심한 일입니다. 나 혼자 떠돌며 방황한다면 죽을 때까지 도둑질을 하든 내 좋은 대로 살겠는데 그녀의 청순한 모습과 아기의 순진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강심장으로 자부한 나도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취직을 하려고 헤맸지만 취직은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노동판에 가서 일을 하려 했지만 그 수입으로는 지금까지 누려온 풍족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속도 모르는 그녀는 내가 학교를 나오면 큰 회사에 유능한 직원으로 입사할 것이라고 큰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 어머니에게도 나를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아기는 날로 커 가고 그녀는 더욱 나를 사랑했습니다. 세상을 잊고 그녀 품에 안겨 있으면 그 이상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과자라는 자신의 비밀을 혼자 씹고 있는 나는 날이 갈수록 불안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녀에게 나의 모든 것을 탁 털어놓고 사과를 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으면 그냥 죽었지 도저히 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나는 갈등 속에 살면서도 돈은 계속 필요했습니다. 당당한 방법으로는 단 십 원도 벌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둑질을 손에서 떠나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적당히 돈이 필요한 만큼씩은 ××를 끌어다 팔았습니다. 도둑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가슴에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 내게는 없는 줄 알았는데 사랑하는 여자와 귀여운 아들을 갖고부터는 양심이 가슴을 할퀴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이기기 위하여 술을 마셨습니다. 옛날에는 폭주는 하지 않았으나 어느새 나는 술에 이성을 잃을 만큼 마셨습니다. 그래도 가슴속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이런 정신적 고뇌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녀는 내게 더 없이 따뜻하고 친절했습니다. 고민이 있으면 함께 나누자고 했고, 함께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자고 했습니다.

교회! 거기가 어딘데 이 도둑놈이 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녀는 내 속도 모르고 아픈 가슴에다 교회라는 말뚝까지 박았습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교회는 안가겠어. 거긴 밤낮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갈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어디 있소. 하나님이 밥 먹여 주는 것 보았소?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거리지. 하나님이 한번만 내게 모습을 보여 준다면 믿을까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소.”

그녀는 내게 하나님 믿기를 몇 번 권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여전히 돈을 잘 가져다주었고 옛날에 예금해 둔 통장도 그녀의 손에 있으며 쓰다 남은 돈을 더 많이 저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따금 우리 집에도 가자고 했고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집에 가면 아버지와 사업 관계로 언약이 다 되어 있는 여자한테 장가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언젠가는 기회를 보아 전격적으로 결혼 발표를 하고 결혼식을 올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진한 그녀는 자기 사정과 똑같다고 웃으며 내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들이 백일이 되었습니다. 그녀와 나는 외부와의 체면과 비밀이라는 구실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백일 기념 사진을 찍고 비싼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호텔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창가에서 우리는 밤이 깊도록 미래의 설계를 했습니다. 그녀는 내 어깨에 볼을 올려놓고 속삭였습니다.

여보, 난 행복해요. 저 반짝반짝 빛나는 넓은 서울을 다 준대도 당신하고는 바꿀 수 없어요. 당신은 멋져요. 이다음에 우리 결혼식도 이 호텔 스페셜 룸에서 해요. 우리 아빠 좋으신 분이에요. 우리 결혼식 여기서 한다면 부산에서 오는 사람만으로도 이 호텔이 꽉 찰 거예요. 당신 부모님도 많은 분들이 와서 축하해 줄 것 아니어요. 나는 우리의 결혼식이 끝나면 저기 숲이 우거진 산밑에 커다란 집을 선물로 사달라고 할 거예요. 아빠는 내 말을 들어줄 것이고요. 정원도 넓은 집으로 살 거예요. 마당에는 작은 못을 만들고 고기를 키우고 그 옆에는 수영장을 만들어서 여름이면 동수(아들)와 수영도 할 거예요. 돈이면 다 되는 게 아녀요? 그렇지요? 마음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큰집과 뜰과 수영장, 정구장이 있는 집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는 거예요. 나는 당신같이 좋은 사람이 곁에 있으니 나머지 문제들은 아빠한테 돈으로 해달라고 할 거예요. 생각해 봐요. 얼마나 멋진 우리들의 스위트 홈이 만들어지겠어요. 우리 아빠가 하려고 들면 이 호텔을 살 수도 있어요. 놀랍지요?”

…….”

거짓말 같아요? 정말이에요. 서울에는 나 혼자 동생들과 가정부와 이모님이 살고 있지만 우리 집도 좋아요. 부산에 부모님이 내려가서 사시는 집도 좋고요. 당신은 이다음에 다 돌아보고 놀라실 거예요. 그러나 그 집들보다 나는 당신이 더 좋아요. 그러니까 내가 비둘기 집 같은 작은 방에서 살아도 불만이 없는 거라고요. 어쩌면 내년 봄쯤에는 아버지의 승낙을 받고 우리가 서울 집으로 이사를 하도록 하라는 엄마의 말을 듣게 될지도 몰라요.”

나는 이 여자가 하는 말이 다 거짓이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얼마나 멋지고 부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미 그런 환경에 살 만한 자격도 없고 내 사정이 거기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이유와 예쁜 여자였다는 이유 하나로 막연히 접근하여 아내가 되어 있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합니까.

나는 그녀의 하는 모든 것이 예쁘고 귀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한 달에 ××를 열 대 이상타고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백 만원 이상 돈을 만들어 그녀 앞에 놓았습니다. 그녀는 그런 내가 부모님의 사랑과 신뢰를 받아 꼬박꼬박 돈을 받고 있는 줄 믿고 의지했습니다.

가을도 깊어 가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니 그녀가 걱정스런 모습으로 나를 맞았습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태연하게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녀는 밤이 깊도록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혹시 이 집에 한홍규라는 사람이 있나요?”

나는 가슴이 쾅하고 내려앉았습니다. 한홍규란 이름이 그녀 입에서 나오다니! 그 이름은 이놈의 진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한홍규란 이름은 나와 영원히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내 저주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댔다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가 다가오는 조짐입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습니다.

한홍규? 많이 들어본 것도 같은데…….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

혹시 친구 중에 그런 사람이 없었나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무슨 일인데 그런 사람을 찾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는 괜히 불길한 생각이 들어서 그랬어요. 어떤 사람이 낮에 찾아와서 이 집에 그런 사람이 없느냐고 묻기에 모른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냥 가던데요.”

, 아무 일도 아닐 거야. 상관없는 일 가지고 마음쓰지 말라고. , 오늘 밤 당신의 기분을 위해서 한잔!”

우리는 맥주를 놓고 마시며 조금 전의 일은 싹 잊었습니다. 그녀는 안도되는 듯 전처럼 밝고 아름답게 그 밤을 즐겼습니다. 나도 다른 날 밤보다 특수한 방법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나도록 내 가슴팍에 못에 찔린 도마뱀처럼 고민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느 놈이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었습니다. 나는 밖에서 들어올 때마다 가슴을 죄었습니다. 누가 덥석 잡지나 않나, 그녀의 표정에 구름이 끼지나 않나…….

그녀가 웃는 얼굴로 맞을 때마다 나는 한숨을 토하곤 했습니다. 산다는 것이 가시방석 같았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술도 마시고 그녀의 육체를 마음껏 애무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문 밖을 방황했습니다. 아래층 주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만 들려도 한 줄기 불안의 칼이 가슴을 저미고 맴돌았습니다. 그녀를 품고 누워 번민했습니다.

이대로 달아나서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게 할까? 아니다, 슬퍼하는 영주의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다.……. 내 과거를 다 털어놓고 용서를 빌까?……. 안될 말, 그녀의 실망이 얼마나 크며 이런 나를 용서할 리가 없어…….’

나는 똑같은 생각들로 밤을 보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 도둑질도 되지 않았습니다. 길에 나서면 누군가 뒤를 바짝 따라와 목을 감아 챌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도 서서 주위를 살피고 또 가다가 살핍니다. 나는 어느새 약해빠진 인간이 되어 당당하지도 못하고 담대한 도둑도 아닌 겁쟁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밥맛도 없었습니다. 나가기가 싫어서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날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렸으며 하고 생각하다가 밖으로 나가 집 주위를 살피다가 돌아오곤 했지만 그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그녀가 시장에 가고 없을 때 나 혼자 있는데 밖에서 누가 노크를 하며 누구 있느냐고 찾았습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싶어 질린 채 문을 열어주지 못하고 주저했습니다. 누군지 온 사람은 쉽게 돌아가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리며 찾았습니다. 나는 끝내 대답을 못하고 웅크리고 있었고 찾던 사람은 10여 분이나 밖에서 서성거리다 갔습니다. 나는 그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놓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계속 암이 자라듯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잠시 후 그녀가 돌아왔습니다.

뭘 하고 계셨어요. 나 없는 동안 손님이 왔다 갔나 보던데요.”

, 잤어.”

좋은 소식이 있어요. 아까 우체부가 와서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아서 그 속달 등기우편물을 아래층 주인한테 맡기고 갔어요.”

무슨 소식이기에.”

엄마가요, 자요, 여기보세요, 당신이 읽어봐요.”

그 편지 내용은 이랬습니다.

<사랑하는 영주 보아라.

네 비밀이 나에겐 큰 걱정거리였단다. 외손자까지 보고 엘리트 사위까지 본 너를 두고 내려온 뒤 밤잠을 못 잤지. 그간 이리저리 궁리 끝에 너의 아버지께 모든 것을 고백했다. 어차피 알 일이 아니냐? 그래서 다 털어놓았다. 너의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그러잖아도 보고 싶은데 왜 한 번도 오지 않느냐며 궁금해 하셨는데 그런 경사가 있었느냐고 기뻐하시며 사윗감을 빨리 보고 싶으시다는구나. 손자도 보고 싶다 시며 더 이상 우리 비밀이 남에게 알려지기 전에 식을 올리도록 하자시는구나. 어떠냐? 나는 이제 날아갈 듯한 기분이다. 돌아오는 일요일에 아버지 차로 서울에 가기로 했다. 너희 남편 감과 집 비우지 말고 기다려주기 바란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영주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이제부터 그녀는 행복의 보금자리에 축복 받으며 날개를 펴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난 뒤로는 전신의 맥이 쑥 빠져나갔고 가슴이 텅 비었습니다.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귀빈 앞에 하얀 드레스에 면사포를 쓰고 부모님과 축하객의 박수소리를 기다리며 가슴이 부풀어 가는 그녀와는 정반대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차라리 이것이 꿈이었으면 싶었고, 꿈이면 깨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이 오신다는 일요일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빨리 오는 일요일이 그녀에게는 늦게 느껴지는 듯 낮이면 밤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고 밤이면 낮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며 재롱이 늘어가는 동수를 들여다보고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밤에 차가 문 밖에 삐익 하고 서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문소리도 듣기 싫었습니다. 옆집 사람이 밤늦게 귀가하여 대문을 쾅쾅 두드리면 나는 형사가 아닌가 하여 잠이 번쩍 깨었고 아침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행복이 오고 있고 내가 원하던 행복이 주먹 안에 잡혀 있는데 나는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오시기 전에 달아나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티 없이 마음씨 고운 그녀를 두고 달아날 수는 없었습니다.

경찰이 잡으러 오기 전에 피신하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길이 아니냐 하는 생각으로 고민도 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누군가는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자가 시간을 끌며 나를 완벽하게 체포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으며 순간순간 목을 죄고 있다는 사실 앞에 도주도 못한 채 그녀 마음을 다칠까봐 고민했습니다. 그 두려운 일요일이 왔습니다. 그녀는 음식도 장만하고 미장원도 다녀왔습니다. 나에게도 목욕이며 이발을 하고 오라고 했지만 밖에 나서기가 싫어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낮 열 두 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소리가 내 귀에는 형사대의 돌입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부모님이 오시는 소리였습니다.

이층 우리들의 방으로 오시는 두 분 어른을 맞으며 나는 내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초라한가를 느꼈습니다. 두 어른은 내가 장인 장모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품위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태연하게 두 분을 모셔 놓고 큰절을 드렸지요.

큰 회사 사장이신 아버지는 과묵하게 그러면서도 인자한 모습으로 나를 보셨습니다. 어머니는 좋아서 환히 웃으시며 우리를 보았고, 그녀는 아버지 앞에 얌전하게 큰절을 올리었습니다. 아버지는 조금도 나무라는 기색 없이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습니다. 내 꼴이 좀 초라하게 느껴졌던지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 사람은 늘 이렇게 수수한 차림으로 살아요.”

요새 사람 다 그렇지 않느냐. 소박한 차림은 좋은 것이다.”

그 날 그녀는 부모님을 만난 기쁨에 어린애가 된 듯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행복한 순간에 경찰이 나타나서 나를 엮어 가면 어떻게 되겠나 하여 긴장해 있었습니다. 경찰이 올 때 오더라도 오늘만은 참아다오 하고 빌었습니다. 두 어른들은 딸과 여러 가지 의논을 하고 떠나셨습니다. 나는 주눅이 들었지만 태연하게 그녀 앞에 버티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즐거움에 빠져 내 사정은 모르고 있었고 그것이 나를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날 밤 그녀는 늦도록 뒹굴다가 나직이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결혼식 1015일에 시킨대요. 그 안에 엄마 아빠가 당신 부모님 한번 만나고 싶대요. 두 달 조금 더 남았어요. 어때요?”

그렇게 빨리? 생각 좀 해 보고…….”

나는 당황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을 그녀의 부모님과 만나게 한다면 내가 저지른 거짓말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그녀의 부모님처럼 큰 회사 사장도 아니고 그렇게 풍모를 지닌 부모님도 아닙니다.

우리 부모님은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내가 그녀와 비교한다면 말이 안 되듯이 부모님끼리의 비교도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 집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합니다. 부천 산모퉁이에 대지 50평에 허름한 기와집 하나가 우리 재산의 전부입니다. 어머니는 근처 야채 밭에서 일을 해주고 저녁나절이면 배추나 무, 상추 등 야채를 받아다 시장에서 파는 일을 하십니다. 농사일을 하는 것인지 장사를 하는 것인지 구분도 안 되지요. 아버지는 노동판을 찾아다니며 일하시고 저녁이면 몇 푼 받은 것을 다 술로 마시고 빈털터리로 돌아오시는 날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한 달에 보름은 싸움질을 하십니다. 어머니가 가까스로 구한 돈으로 밥 짓고 국 끓여 놓으면 아버지는 투정을 하셨지요. 그때마다 돈도 못 벌어 오면서 무슨 낯으로 밥투정이냐며 밥상머리에서 싸움은 시작됩니다. 그런 날이면 나는 말없이 물러나 뒷산 나무 아래 가서 울기도 하고 몸부림도 쳤습니다.

나는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이 너무도 싫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이기 때문에 가슴속에는 돈에 대한 한과 부모님에 대한 불만으로 꽉 차서 늘 불량소년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이 다 행복해 보이는데 오직 우리 부모님만은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생을 구질구질한 직업에 눌리고 밤마다 찡그리고 싸우는 부모님은 남에게 우리 부모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고 자랑할 만큼 품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린 동생들과 같이 공부도 제대로 못했고 늘 우울하게 컸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동생들은 지금 공장에서 건실하게 기술자로 바르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집 사정은 전보다 좋아졌습니다. 동생들이 벌어들이기 때문에 어머니도 허리를 펴시게 되었지만 내가 문제입니다.

×× 도둑질이 잘하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과자라는 딱지가 붙고부터는 살아갈 길이 막혔습니다. 어디를 가나 주민등록 등본을 요구했고 그 다음은 집으로 가 보라는 멸시뿐이었습니다. 나는 불행한 생활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영주라는 여자를 만나 비로소 삶이 무엇이며 행복이 어떤 것이고 정상적인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 짓에서 손 떼고 건실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귀여운 아들을 위해서라도 건실하게 살고자 발버둥쳤지만 어디서나 전과자의 길엔 빨간 줄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평범한 생활로 반달 이상을 보냈고 우리의 정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양쪽 부모님을 언제 만나게 할까를 묻는 그녀의 말에는 가슴이 막혔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고백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을 쉽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며칠을 두고 무슨 말로 어떻게 시작하여 그녀 앞에 나의 모든 비밀을 말할까 궁리했습니다. 어차피 일은 벌어진 것입니다. 결혼식까지 올리자는데 무엇을 어떻게 숨기겠습니까. 하루는 술을 마시고 그녀 앞에 자연스럽게 다가앉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영주, 나 고백할 게 있어.”

당신 왜 이래요? 고백할 게 따로 있어요?”

있어. 아주 심각한 비밀이야. 영주가 알면 크게 놀랄…….”

저는 놀라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 비밀이 무슨 비밀이 있겠어요. 당신 옛날 애인 얘기?”

아니.”

그럼…….?”

영주는 상상도 못해. 내 개인의 문제니까.”

말해 봐요. 하지만 꼭 알아야 할 일이 아니면 그냥 넘어 가구요.”

아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비밀이야.”

겁이 나는데요?”

그녀는 생긋이 웃었습니다. 그 얼굴이 너무도 천진해 보여 마치 천사 같았습니다. 그런 여자 앞에 비밀을 털어놓으려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굳히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영주, 말하기 어려운 비밀이 있어. 다 말해도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있어요.”

나는 나쁜 사람이었어. 그렇지만 어차피 알 건 알아야 하니까.”

그녀는 내 굳어진 표정에서 불안한 느낌이 든 듯 어두운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주, 나는 영주를 속이고 있었어. 우리는 큰 부자가 아니야.”

…….”

부잣집 아들이라고 한 것부터가 거짓말이었어…….”

그게 비밀이에요?”

비밀이 아니면.”

꼭 부자여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요. 당신 집이 큰 부자가 아니래도 좋아요. 그저 살만하면 되지요. 우리한데 뭐 그리 큰돈이 필요해요. 필요하면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돼요.”

나는 기가 막혔습니다. 그녀가 너무 쉽게 이해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큰 부잣집 딸이라 그런지 돈 문제에 대하여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나를 더욱 놀라게 해주었습니다.

당신 내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요?”

얼마? 백만 원?”

아니…….”

그보다 더?”

더라니 어디서 그보다 더 많은 돈이 생겼지?”

당신이 가져다 준 돈이 얼만데……. 우리 생활비에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한 것이 오백만 원이고요. 엄마가 지난번에 가시면서 내 통장을 보시더니 알뜰하기도 하다 하시고 상금으로 내 통장 액수와 똑같이 주시겠다며 오백만 원을 더 주셨어요. 천만 원이에요.”

천만 원?”

나는 놀랐습니다. 내가 어느새 쓰고도 남을 만큼 도둑질을 그렇게 많이 했을까? 그리고 더욱 놀란 것은 그녀의 알뜰한 마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치나 하고 화려하며 낭비가 심할 것 같은 그녀가 상상외로 알뜰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날 밤은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부모가 어려운 집안이라 해도 문제시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안 것으로 족했습니다. 며칠이 더 지났지만 나는 고백해야 할 중요한 것이 더 남아 있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가짜 S대 재학중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학벌이라곤 초등학교밖에 못 다닌 건달이 대졸이라고 속였노라 말하면 그녀는 어떤 표정이 되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겨우 초등학교 졸업생이 나를 속이고……. 하고 화를 내며 무시하고 놀랄 그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이 분해! 분해! 나를 속이고……. 하며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그녀. 그래서 며칠을 더 망설이다가 어느 날 입을 열었습니다.

영주, 나 또 비밀이 있어.”

또요?”

내 비밀을 다 말하지 않고는 도저히 편히 살 수가 없어요. 영주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적당히 살다가 헤어져 버리고 싶다면 끝까지 비밀을 숨긴 채 살고 싶지만…….”

다 말해 봐요. 무엇이든지 이해할 수만 있으면 이해하겠어요.”

나 말이야…….”

S대 재학생도 아니고……. 학벌이 보잘것없는 사람이야.”

당신은 나를 속였지만 솔직히 말해 줘서 고마워요. 나는 얼마 전 당신이 학벌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학벌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잖아요. 성실하면 돼요. 당신 입으로 솔직한 고백을 하여 주셔서 좋아요. 저는 당신이 학벌보다 성실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학벌이 부부 생활하는데 문제 될 것은 없어요. 당신, 이제는 더는 말하지 말아요.”

알았어.”

나는 그녀가 조금도 변함없이 대해 주는 것에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은 소설 속에서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아무튼 나는 가슴속에 컴컴하던 구석이 환히 밝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위해 더욱 뜨거운 밤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나도 전에 없이 완전한 내 아내가 되어가고 있는 그녀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 동안 몇 날이 가고 내 가슴엔 또 못 다한 고백이 남아 암처럼 고통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혼인신고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주민등록을 맞추고, 그러다가 드러날 전과자라는 기록이 내 가슴에 끌로 파듯 저며 들어온 것입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더 용서받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어떤 신분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결혼식 날이 바싹 바싹 다가왔습니다. 나는 또 이를 악물고 말했습니다.

영주, 나 또 마지막으로 용서받고 싶은 게 있어.”

용서는 다 했는데요.”

어차피 언젠가는 꼭 알게 될 일이야…….”

무슨 일이 또 있어서 그래요?”

……. 호적등본 떼어 보면……. 전과자야. 전과 6.”

네에?!”

그 순간 그녀는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이 그렇게 죽는 모습을 하는 것도 처음 보았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큰 뱀에게 놀라기라도 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닭싸움하듯 올려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나며 나를 피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너무 잔인한 멍에를 씌우셨습니다. 그것까지도 용서해 줄줄 알고 입을 연 내 머리에 벼락을 때려 주십시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절규했고, 그녀는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나를 징그러운 벌레라도 보듯 피하며 물러나더니 무릎걸음으로 어린아이를 안고 문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남긴 한 마디,

전과자는 싫어요.”

나는 기가 막히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으로 전신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놀라서 달아났습니다. 나는 넋 빠진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엎드려 울었습니다. 밖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린것을 안고 나가더니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절망하여 울다가 술을 마셨습니다. 세상을 다 부수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이튿날도 사흘이 지나도 그녀는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밥도 먹지 않고 미친 듯이 술에 취하여 방에서 뒹굴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전과자라는 말에 그렇게 충격을 받을 줄 알았다면 나는 그녀 모르게 어디론가 떠나버렸어야 했습니다.

전과자! 그건 영원히 내게서 씻지 못할 오명입니다.

감옥에 계신 하나님

나는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누가 와서 잡아가도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밤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혹시 그녀가 다시 오지 않았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를 가지고 문을 열었습니다. 찾아온 사람은 의외로 건장하게 생긴 두 형사였습니다.

한홍규, 맞지?”

이 한 마디에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수갑을 받았습니다. 나는 경찰에 잡히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환하게 압니다. 형사에게 어떻게 해야 한 대라도 덜 맞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차라리 누군가에게 맞아죽었으면 싶은 충동에 경찰서에서는 괜한 악다구니도 썼습니다.

며칠 동안 마신 술이 개고 경찰서에서 구치소로 왔고 구치소에서는 별 일곱 개를 자랑하며 몇 개의 감방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나는 감호에다 재범이 받아야 할 형기까지 합쳐서 감옥살이로 일생을 바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감방에서 썩는 동안 세월은 갔고, 나는 감방장이 되어 한 방의 왕이 되었습니다. 나는 강도, 절도, 강간범 등 강력범만 수용되는 감방에서 악질 감방장으로 세상에서 못 다한 화풀이를 여지없이 했습니다. 신입자가 입방하면 다른 죄수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신고를 받았습니다. 나는 모포로 쌓아올린 용상(?)에 앉아 입을 다물고 노려봅니다. 그리고 침묵이 반시간 이상 흐르게 둡니다. 그 동안 신입자는 절절 맵니다. 이때 나는 기발한 신고 방법은 없나 생각하다가,

죄수 선서 하나!”

합니다. 이때 머뭇거리거나 대답하지 않으면 바로 앞 선배 죄수를 불러 마주 세웁니다. 그리고 새 식구에게 하루 먼저 온 죄수의 따귀를 때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면 새 식구가 된 죄수는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살짝 아프지 않게 때립니다. 그때 나는 번개 같이 일어나 그를 머리가 돌아갈 정도로 벼락치듯 때리며

이렇게 때리란 말이다. 알겠나?” 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줍니다. 깜짝 놀라 그는 얼결에 선배 따귀를 때리고, 얻어맞은 선배는 더 힘을 주어 따귀를 칩니다. 둘이 열대씩 때리기를 나누고 나면 그치게 하고 선배를 향하여 죄수 선서 하나!” 하고 말하며 선배 죄수가 얼른 받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

그리고 이어서 새 식구에게

죄수 선서 둘!” 하고 명합니다. 이때 빨리 대답이 안 나오면 또 내 주먹이 날아갑니다. 그리고 선배에게 선서 둘을 복창시킵니다. 선배가 새 죄수를 향해, “신나게 때리면 ×나게 맞는다!” 합니다. 그것을 새 죄수가 복창하면 선배가 알았지하며 따귀를 때립니다. 이때 죄수가 얼결에 맞 때리는 날이면 그는 그 날 장사 치릅니다.

열 대고 스무 대고 선배가 때리고 싶은 대로 실컷 때리도록 둡니다. 새 죄수는 차렷 자세로 ×나게 터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해 놓고 비스듬히 누워 몇 대나 때리는지 세어 봅니다. 죄수들은 말 한 마디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합니다. 선배의 화풀이가 끝나면,

죄수 선서 셋!” 하고 명합니다. 이때는 죄수가 별이 많을수록 재빠르게 댑니다.

하루 선배를 조상같이 모신다!”

나는 그에게 명합니다.

다시

하루 선배를 조상같이 모신다!”

다시

하루 선배를…….”

나는 계속해서 다시, 다시 반복합니다. 새 죄수는 그때마다 복창하면서 방안의 선배들을 향하여 절을 합니다. 신고식이 끝나면 곧장 뼁끼통(변소) 앞으로 보냅니다. 무료한 시간을 이런 행사로 보내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감방에는 입실은 고참인데 만년 뼁끼통 앞에서 자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곁에 역시 하나가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뼁끼통 앞에서 수문장 노릇을 하는 죄수는 1179번이었는데 지독한 예수쟁이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수문장 1280번 죄수도 예수쟁이였는데 엉터리입니다.

1179번이 입실하던 날이었습니다. 푸르딩딩한 죄수복을 입혀놓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난 사람도 별 볼일 없는 꼴이 됩니다. 그러나 그 1179번은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보는 눈빛이며 행동거지가 천하지 않고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그런 특성이 방장이 내 눈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나는 그 인품에 열등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혹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따귀 때리기 신고식을 마친 뒤에 물었습니다.

종교는?”

…….”

종교!”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라? 예수쟁이?”

…….”

안 들려? 복창해 나는 예수쟁이입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번개같이 달려들어 별이 튀도록 따귀를 올려붙이고 복창!” 했습니다. 1179번은 나직이

나는 예수쟁이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모포로 쌓아올린 용상(나 혼자 부르는 이름)에 앉아

예수! 나를 똑바로 봐. 네가 예수쟁이라구? 나는 부처다!”

그리고 책상다리로 꼬고 앉아 오른팔을 올리고 좌선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여기는 교회가 아니다. 살아 있는 이 부처님의 대웅전이다. , 이 앞에 절을 해.”

나는 말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1179번은 눈을 돌린 채 따르지 않았습니다.

, 1179번 졸고 있나?”

…….”

절을 하지 않겠다고?

, 절은 못합니다.”

왜 못해?”

방장님 개인으로 절을 하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라는 이름을 절을 강요하면 절대 못합니다.”

좋아. 절대 못 하겠다구?”

못합니다.”

이 새끼 정신 있나, 없나?”

순간적으로 주먹이 몇 차례 올라갔고 나는 그의 기를 꺾고 종교심을 무너트리기 위하여 악랄한 수법을 썼습니다.

“3003!”

!”

이 예수쟁이를 너한테 맡긴다.”

명령한 하십시오.”

벼락 30!”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3003번은 손을 날렸고, 1179번은 볼이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맞았습니다. 나는 다시

“1179. 이건 맛보기다. 빨리 이 부처님 앞에 절하지 않으면 또 죽어. 알겠나? 고분고분 따르면 너는 편한 자리에 두고 식사당번도 안 시키겠다. 알겠나?”

못합니다.”

그으래? , 3003, 1280, 2095번 일어서.”

나는 그 죄수를 1179번으로 부르지 않고 예수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희 셋이 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감방 안에는 십자가 틀이 없으므로 예수를 두 사람이 양쪽에서 각각 팔을 잡고 벽에 기대이게 해놓고 한 사람은 젓가락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는 벽에 팔을 벌리고 섰고 죄수 한 사람이 젓가락을 손바닥에 대고 쑤십니다. 예수는 아파서 이를 악물고 몸을 꼬았습니다. 나는 그 턱을 툭툭 치면서 조롱했습니다.

예수, 이래도 내 말 안 들어?”

예수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젓가락 못을 그 이마에도 꽉꽉 쳤습니다. 이마에 피가 맺히고 양손은 부어올랐습니다. 무척 아플 텐데 예수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3003!”

!”

저 예수 발가락 사이게 젓가락 끼고 조여!”

예수는 큰 수난을 당했습니다. 발가락 사이에 젓가락을 끼고 조이자 그는 울었습니다. 몸을 틀며 주여! 주여!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은 정말 멋진 신고식이었습니다. 예수는 끝까지 내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를 뼁끼통 앞에 자게 했고 나한테 절을 하는 날 인간 대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입방한 날부터 틈만 나면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와 성경책은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었습니다.

예수, 네기 읽는 책은 뭐냐?”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여기가 어딘데 네 맘대로 하나님이야. 하나님은 너희 집에나 가서 불러. 그 두꺼운 책 이리 내.”

안 됩니다.”

? 나는 읽으면 안 되냐?”

읽으시겠다면 드리겠습니다.”

가져와 냉큼!”

예수는 조심스럽게 성경책을 내 앞에 두 손으로 내밀었습니다.

이봐 예수, 부처한테 절 한번 해서 안 될 게 뭐 있어. 또 내가 진짜 부처냐?”

그래도 안 됩니다.”

나는 성경을 잡아 한 가운데를 쫙 찢을 자세를 취하며 명했습니다.

예수, 당장에 부처에게 절하지 않으면 이거 알지?”

방장님 그것만은…….”

말이 많다. 절 한번 하기가 그렇게 어렵냐?”

부처님이니까 절하라고 하는 한은 죽어도 안 됩니다.”

죽어도? 좋다. 나 부처가 아니라 한홍규다 내 앞에 절해 봐라.”

안 됩니다. 방장님 속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너 끝내 이 핑계 저 핑계로 거절할 거야?”

순간 찌지직 소리와 함께 성경을 두 조각이 났습니다. 예수는 자기 팔이라도 찢긴 듯 안타까운 얼굴로

방장님 참으십시오.”

하며 팔을 내밀어 찢은 성경을 받아들 자세를 취했습니다.

손 치워! 예수.”

제게 그대로 주십시오.”

안 돼. 줄 수 없어 이건 내 뼁끼통 밑씨갯감이야. 알았나 예수?”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러시면 큰일 납니다.”

웃기지 마라, 큰일은 네가 났을 뿐이야. 이 종이로 밑을 씻으면 얼마나 좋은지 아냐?”

예수는 애걸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잔인하게,

그렇게 중하면 부처한테 절 한 번만 꾸벅 하면 되잖아.”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곁에 있던 1280번이.

예수, 절 한번 하기가 뭐 그리 어려워. 성경으로 밑을 닦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냥 보고 있을래? 방장이 진짜 부처도 아닌데.”

나는 이 말을 받았습니다.

예수, 너만 예수가 아니야. 1280번도 예수였다구. 이놈도 예수쟁이가 아니었다면 식사당번은 면했을 텐데.”

1280번 죄수도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엉터리 교인이고 바퀴같이 약삭빠른 놈이었습니다. 내 방에 나까지 열 한 명의 죄수가 있었는데 두 사람만 빼놓고는 다 불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라고 부르며 두 사람을 놀리기도 하고 가혹하게 들볶기도 하면 다른 것들은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불신자들 중에는 크리스천을 공연히 미워하거나 따돌리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기는 감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예수의 성경을 내 머리맡에 놓고 아침마다 몇 장씩 찢어내어 밑을 닦았습니다. 예수는 그때마다 마음 아파했고 1280번은 예수에게 더 뜯어져 나가기 전에 절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1280번은 처음 신고하던 날 종교를 물으니 기독교라고 하기에 용상에 앉아 내가 부처라고 절하라고 하자 서슴없이 했습니다. 나는 바로 그 점이 미워서 1280번은 변소 앞 두 번째에 두고 설거지를 예수와 돌아가며 하도록 했습니다.

1280번은 제가 편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성경책을 가지고 들어왔으나 내가 바치라고 하자 한 마디에 바쳤습니다. 그의 믿음이 너무 엉터리라 그에게 주는 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예수보다는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인가 자는 척하고 누워 있자니 예수가 내 머리맡에 있는 성경책을 살짝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 보자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가서 매일 아침 떨어져 나갈 책장들을 모조리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줄 알고 내 곁에 놓더니 엎드려서 나직하게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불쌍한 인생들을 건강으로 지켜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특히 이 어리석은 것 주님 앞에 부끄러운 죄인이 되었습니다. 갇혀서 고생하는 동안 더욱 하나님 가까이 가는 믿음 주시옵소서. 이 감방 안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방장님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주님의 말씀이 귀한 줄 모르고 휴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 운동하는 능력인 줄을 믿사오니 비록 그가 눈으로 주님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뒤로 받아쓰지만 그에게 말씀의 능력이 그 육신의 깊은 곳으로 배어나는 기적을 주옵소서. 주여, 방장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는 그가 가느다란 소리로 드리는 기도 소리를 어렴풋이 듣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여전히 성경으로 뼁끼통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도 없는데 꼭 곁에 있기라도 한 듯 나직하고 정성스런 소리로 기도하는 예수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쳐도 많이 미친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 좋은 예수쟁이가 왜 하나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단 말입니까?

나는 예수가 입방한 날로부터 그를 골려주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위하여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 가소롭게 느껴졌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죄수를 용서해 주라 한다고 용서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다시는 나를 용서하라는 기도 따위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엎드려 기도합니다. 밥을 받아 놓고도 기도했습니다. 물 한잔을 마셔도 기도했습니다. 자기 전에는 남들이 다 자도록 기도했습니다. 무슨 기도할 걸이가 그리도 많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예수는 믿지 않는 사람 하나를 두고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감옥에 갇힌 것은 죄를 지은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면 여기에 왔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곧 용서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형기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순간 용서하고 구원해 주십니다.”

어디 그런 증거라도 있소?”

있지요.”

어디 있소?”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 마가복음 1527절에서 32절까지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날 있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못 박히시던 십자가 옆에 강도들이 양편에 하나씩 함께 달렸습니다. 이때 지나가던 자들 중에는 예수를 모욕하며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였고 그와 같이 있던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저가 남은 구원한다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하라 할 때 십자가에 달린 양편의 죄수 중 한 사람도 예수를 향해 욕을 했습니다. 이때 같이 달린 죄수 중 다른 하나가 예수를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것도 못하는 것이 무슨 구세주냐? 하였습니다. 또 누가복음 2339절에서 43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다른 강도가 그 사람을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마땅한 죄 값을 받는 것이니 이는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예수를 향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가 그에게 대답했습니다.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습니다.”

하지만 나 같은 죄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소?”

사람들은 일생을 통하여 선을 행해야만 그것이 오랫동안 공적으로 쌓여서 구원받는 것이라고 억측들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60년 동안 애쓰고 노력한 좋은 공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의외의 사건으로 큰 죄를 지었을 때 그 공로를 인정하여 당장 지은 죄를 다 용서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공로를 쌓은 착한 사람도 큰 죄 하나만 지으면 그 순간부터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 평생을 좋은 일 한번 못해 보고 죄만 지은 죄수가 그 죄의 용서를 받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겁고 큰 죄도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그 순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평생 선을 행한 사람이 한 순간 실수 하나로 죄인이 되듯 평생 죄인도 한 순간의 회개만 바로 하면 죄인의 멍에를 벗는 것입니다.”

나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다가 비위가 뒤틀렸습니다.

“1179, 5000, 입 다물어.”

죄를 짓고 들어온 죄수 주제에 무슨 설교까지 하나 싶어서 1179번이 무슨 죄를 지었나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1179번 죄명은?”

사기죄였습니다.”

예수도 사기를 치나?”

진실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변명인가?”

아닙니다.”

죄인은 죄를 지었으니까 구속되는 법. 일단 감방 신세를 지고 있는 한은 죄수야.”

…….”

감방 안은 늘 냉랭하고 메마르고 답답한 곳입니다. 큰 소리로 떠들어댈 수도 없고 제 맘대로 기지개 한번 높이뛰기 한번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새 소식도 없고 새로운 사건도 없습니다. 열한 명에게 일어나고 있는 신상 사건이 다이고 새 식구가 늘면 그를 맞아 짓궂게 괴롭히는 신고식이 재미일 수도 있습니다.

“1179, 네가 믿는 하나님이 세상에 있다는 증거가 있나?”

있습니다.”

있어?”

인간의 가운데 계십니다.”

인간의 가운데라니 사타구니 밑에 있는 물건 말인가?”

다른 죄수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봐, 눈 똑바로 뜨고 제대로 살라구. 종교라는 거추장스런 것을 달고 살다 보면 인생 낙오자 되기 쉬워. 네가 뼁끼통 신세를 못 면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냐?”

압니다.”

아는데도 하나님인가?”

영광입니다. 누군가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테니까요.”

저런 머저리. 생김새는 그럴 듯하게 생겼는데 하는 짓은 맹꽁이야. 이봐 예수! 내가 성경 몇 권이나 뒷구멍에 처발랐는지 알겠나?”

…….”

내가 감방 신세 십 수 년에 성경 찬송가 백 권도 더 밑 씻어 버렸을 거다. 하지만 성경 책장 하나도 찌르는 것 못 봤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걸 그냥 두겠냐. 내가 하나님이라면 그런 놈은 벼락을 쳐죽이겠다. 그래도 하나님이 있다고 우기겠나?”

.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주시기 전에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매를 들기 전에 몇 번씩 용서를 하십니다.”

하나님 보기나 했나?”

하나님은 바람과 같고 소리와 같고 냄새와 같은 분이며 우리의 숨소리까지 세시며 심령 속에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따위 되지 않는 소리 마. 보았나, 못 보았나?”

하나님이 보일 때는 연기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거짓말 지껄이지 마!”

꼭 보아야만 믿는 믿음은 보지 않고 믿는 믿음만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겐 분명히 와 닿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바람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믿습니다. 바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보았기 때문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느꼈기 때문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소리도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우리 청각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고 냄새도 우리의 취각을 통하여 존재하지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거나 미워할 때 마음이 오고 가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분명히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에 의하여 기뻐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이 우리를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다스리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시끄럽다.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예수, 오늘밤은 이불 없이 자봐! 하나님이 그래도 좋은가.”

그 날 밤부터 그에게 덮는 이불을 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폭군 황제 같으냐 하면 누구도 내 말에 대꾸를 하면 반드시 벌이 내려지고 상당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나는 담요를 모두 거두어 내 침상을 높이 쌓고 그 위에 누워 자면서 다른 죄수들에게는 모포 두서너 장만 주었습니다. 한 장은 깔고 한 장은 덮고 자게 해놓고 보면 가관입니다. 서로 잡아당겨 덮으려고 합니다. 추워서 웅크리고 자는 것을 보면서도 내 몸 따뜻한 것만 생각했습니다.

나 같은 감방장을 만나면 죄수들은 고생 위에 고생을 더 합니다. 나는 남들을 괴롭히면서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동정을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나는 출옥하자면 23년이 걸립니다. 61세가 되어야 감옥 문을 열고 나가는 신세였습니다. 61세에 머리 허옇게 세어 가지고 나가서 뭘 합니까. 차라리 콩밥이나 먹다 죽는 편이 낳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삶의 희망을 포기했습니다.

누구를 동정하고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이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키는 감방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다 늙어서 나가면 지금 함께 있던 사람을 만난다 해도 알아볼 수 없거니와 알아보면 어쩌겠습니까. 나이가 많든 적든 따질 것도 없고 돈이 많든 적든 학식이 높든 낮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나는 날로 횡포해졌습니다. 들어왔다가 나가는 죄수, 또 어디선가 굴러 들어오는 죄수, 감방은 비울 날이 없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정을 둘 수 없었고 정을 줄만큼 마음이 유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몽둥이같이 무섭고 돌같이 차가운 인간이었습니다. 인정이 안 통하는 내 가슴에 신인들 통하겠습니까. 불교도 기독교도 소용없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내 배만 부르고 내 등만 따듯하면 되었지 곁에 사람이 굶어죽든지 얼어죽든지 알 바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죄수들은 나에게 말도 못 건네게 할 만큼 나는 험악한 황제였습니다. 다만 예수만은 그나마 말대답을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예수와는 마음이 열려지는 느낌을 가졌지만 절대 겉으로 표시한 일이 없고 밤마다 아침마다 나는 지독한 황제로 악하게 살다가 이 방에서 죽어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출옥하는 사람들에겐 좋을 것이지만 나 같은 장기 죄수에게는 세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일 보자라던가 내일 무슨 기적이 있을까 하는 등의 기대나 희망이 없는 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방에 들어오는 죄인은 나에게 이를 갈다가 나갑니다. 어쩌면 자는 나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죄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에게 불만하고 복수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혹독하게 죄수들을 괴롭히면서 어떤 놈이고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라 나는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못 죽어서 사는 신세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가혹하게 해도 하루 선배를 조상같이 모신다는 죄수들만의 수칙이 지켜지는 한 나는 폭군이었습니다. 범털(돈 있는 죄수)이 들어오면 괴롭혀서 좋은 것이 들어오게 강요하고 개털(무전)이 들어오면 개 취급을 했습니다.

장기수 악질 방장으로 유명한 것은 교도관들도 알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질이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내 방으로 들어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악질이고 주먹이 세었어도 내 방에 들어오는 자는 바닥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나는 무서운 게 아무 것도 없었고 아쉬운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감방 안에서의 나의 생활은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불만이 하나 있었습니다. 먹고 자는 것은 다 좋았지만 여자를 끼고 자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자 궁둥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벌써 여자 구경 못한 지가 몇 년 되었습니다. 여자를 만져보는 것은 고사하고 멀리서나마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다른 죄수들에게 어떻게 하면 여자 구경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1280번이 말했습니다.

이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습니다.”

어디냐?”

교회입니다.”

교회?”

그렇습니다. 거기 가면 여자 간수도 있고 여자 죄수들이 있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 거기는 어떻게 하면 가냐?”

예수를 믿으시면 됩니다.”

예수를 믿어?”

여자 구경하려면 그 길밖에 더 있습니까?”

임마, 여자 보자고 믿기 싫은 예수까지 믿어?”

여자 구경. 그것 참 기가 막힌 것입니다. 나는 61세가 되어서야 다 일그러진 육신으로 나가므로 여자를 주어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여자가 좋은 것도 젊었을 때가 아닙니까? 늙기 전에는 여자 구경도 못해 보는 신세가 되었으니 문제였습니다.

그까짓 여자 보면 뭘 해! 그림의 떡인데……. 그걸 보자고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어? 안될 말……..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몇 달을 보냈습니다. 부러운 게 아무 것도 없는데 그 야리야리한 허리며 하얀 얼굴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도 감방 출입을 많이 하여 집에서 면회도 오지 않습니다. 온 종일 보는 것은 푸르딩딩한 옷에 찌든 얼굴로 하루하루를 세고 앉아 감방 나가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들의 모습뿐입니다. 그것들 바라보기도 지쳤습니다. 새로 들어오는 죄수도 없고 무료한 날이 계속될 뿐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여자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자 구경이라도 하자면 교회밖에는 더 없으니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고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나는 1280번을 불렀습니다.

, 누구한테 들었어? 교회가 교도소 안에 있단 말, 정말이냐?”

, 있습니다. 어디든지 있어요. 교회에 가고 싶은 사람은 교도관한테 신청을 하면 되는 걸요.”

나는 교도소 밥을 많이 먹고살았지만 감방 안에 교회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감방살이 몇 년씩을 하면서도 교회에 간다는 죄수는 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를 향해,

예수, 너는 교회는 안 가는 예수꾼인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한 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나?”

여기서 혼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편리한 예수군.”

“1280, 너는 교회에 가 보았나?”

안 갔습니다. 하나님을 믿긴 했어도 적당히 믿었으니까요. 별 것 있습니까. 하나님도 인간을 위하여 있는 건데 편리하고 유리한 대로 믿으면 되는 거지요.”

가짜 새끼, 그럼 못써!”

못 쓰긴요. 가짜로 믿어도 안 믿는 사람보다는 낫지요.”

이 새끼. 여물통 닥쳐

예수, 찬송가 이리 가져와 봐.”

나는 찬송가를 빼앗아 무릎에 놓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아는 곡이 없었습니다. 그 날부터 경호원이 지나며 들여다볼 때는 찬송가를 들여다보며 믿는 척을 했습니다. 듣기는 싫었지만 예수와 1280번에게 찬송가도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1280, 이제부터 나는 가짜 예수쟁이가 된다. 심심한데 교회에라도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겠다.”

정말입니까?”

정말이지.”

나는 착실한 가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다시 들여온 성경책을 들치고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밑 닦는 종이는 찬송가며 성경책을 썼습니다.

예수는 새 성경책을 나에게 맡기고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또 뜯어서 밑 씻는 게 아닌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나는 쓰던 것 다 떨어지면 아무리 예수의 것이라 해도 또 뜯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이 보는 앞에서 성경, 찬송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6개월 동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찬송도 부를 줄 모르고 성경도 여기저기 들춰보았지만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책을 펴들고 앉았으면 잠이 먼저 왔습니다. 그래도 졸면서 가짜 예수쟁이 노릇을 했습니다.

하루는 1280번을 시켜서 교회 가는 신청을 하라고 했습니다. 한 방에서 한 달에 한 명씩만 교회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교회에 출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19826월 어느 주일날입니다. 가짜 예수쟁이가 된 나는 교회에 나가는 예수쟁이들의 뒤를 따라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진짜도 아닌 가짜로 여자 구경하자고 들어선 나는 부끄러운 것도 몰랐습니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배정 받고 앉았습니다. 잠시 후 여자 죄수들이 수십 명씩 줄을 서서 들어오고 그 뒤를 여자 교도관들이 또 한 줄 들어왔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남자 교도관들이 들어와 입구 쪽을 메웠습니다. 무서운 교도관들 중에 예수쟁이가 생각 외로 많았습니다.

그 날은 교도관중에 계급이 높은 분이 설교를 맡아 했습니다. 죄수 수백 명에 교도관 수십 명이 모여 찬송을 부르기도 하고 기도도 하였습니다. 나는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찬송도 부를 줄 모르기 때문에 눈길을 이리저리 보내며 여자들 쪽만 눈이 돌아갈 정도 바라보았습니다.

참 오랫동안 보는 여자들은 모두 미인으로 보였습니다. 몸에는 푸르딩딩한 죄수복을 걸쳤지만 피부는 모두가 곱고 예뻤습니다. 처음 보는 여자들도 아닌데 그렇게도 아름답게 보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얼마 동안 찬송이 진행되고 기도를 하더니 높은 분이 단상에 서서 성경을 펼쳐 놓고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설교가 한 마디도 마음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하는 소리 그 소리겠지 하고 여자들 얼굴 보기만 열심이었는데 어느새 그 집사(추후 알고 보니 그 고위 교도관은 집사였음)의 설교 소리가 귀로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로 시작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그 집사님의 설교 중 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와 나를 감동시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가 뭐라고 해도 죄인이라는 레텔 외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인 중에 죄인이며 감옥에 갇힌 죄수입니다. 아무리 애쓰고 힘들여 이곳을 탈출하려 해도 한 개인의 힘으로는 한 발자국도 못 나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당신들은 이 감옥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잃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 감옥 이외의 벌은 더 이상 줄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의 형벌입니다. 여기서 형기를 마치고 나가는 것은 일단 세상에서의 죄과를 몸으로 치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지은 죄를 육체가 갚았다고 하지만 영적으로 죄를 다 갚은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지은 죄는 영적으로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집사 얘기가 귀에 들려오다가 그쳤습니다. 내 눈이 어떤 예쁜 여죄수의 얼굴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녀의 해쓱하고 맑은 피부와 죄인답지 않게 예쁜 얼굴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곁에 사람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녀에게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사님의 음성이 벼락같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도 세상 법으로 따지면 민심을 소란케 한 범죄로 갇히었던 전과자였습니다. 또 옥에 갇혔던 선지자가 많았습니다. 야곱이 감옥에 갇히어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받았고 바울 선생이 감옥에 갇힘으로써 그 신앙의 열매가 크게 달렸고 결실이 많았던 것입니다.”

나는 예수도 전과자였다는 소리와 누군지는 모르나 바울이 옥에 갇혀 있었다는 소리에 귀가 열렸습니다. 집사님의 설교는 내 머릿속을 파고 들어왔다가 그치고 눈으로 들어오는 여자들 모습에 빠져들곤 하였습니다.

바울 선생은 옥에 갇히어 그의 참 믿음과 삶을 깨달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전체 교회에 편지로서 사도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감옥은 사람만 가두어 놓고 육체적인 고통이나 주고 억압하자는 곳이 아닙니다. 강력한 통제 속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삶의 진정한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어 새로운 인간성을 회복시켜 세상에서 새롭게 살게 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요나가 스올(큰 물고기)의 배속에 갇히어 있듯 높고 깊은 담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스올의 배속에서 요나는 절망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야훼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야훼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상전에 미쳤나이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야훼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육지로 토해내게 하였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이 감옥의 담이 아무리 높고 법의 형벌이 아무리 무거워도 하나님께 상달하는 기도와 믿음만 있으면 여러분은 이 담을 무너뜨리고 법을 초월하여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오직 믿음과 기도만이 여러분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안으로 영적인 평안을 얻는 길도 이 길밖에 없고 밖으로 육신의 자유를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구원밖엔 없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여러분은 영원한 죄인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의 선고된 형량을 줄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는 자만이 이 세상 법을 이기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고통 중에 신음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을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이 말이 내 귀청을 찢는 듯이 크게 들려왔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는 한 마디가 가슴 밑바닥을 깊이 찌르고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듯 화끈화끈하게 전신을 때렸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의자에서 내려앉아 무릎을 꿇고 좁은 틈바구니에 머리를 박았습니다. 옆에 누가 있는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쏟아지면서 가슴속이 불타듯 뜨거워 오르면서 내가 지은 죄들이 물을 퍼붓듯 눈앞에 모여들었습니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입을 열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부모님께 효도 한번 하지 못하고 부모님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마음이 음란하여 지은 죄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도둑질한 죄 천 번 죽어도 못다 갚을 이 죄인을 벌하여 주옵소서.”

나는 무슨 말들을 얼마나 하면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나도 잊었던 죄가 수없이 떠오르고 그것이 모두 죽을죄가 된다는 것을 일시에 깨달았습니다. 전신이 땀에 흠뻑 젖었고 뜨거운 풀무 불에 빠졌다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가슴속이 후련하고 가슴에 겹겹이 쌓였던 암덩이를 도려내고 무엇으로 씻어낸 것만 같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모두 밖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가슴을 풀어놓은 기분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시원함과 내가 그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 날 나는 방으로 돌아와 찢어 벌려놓았던 성경책이며 찬송가를 모두 정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불렀습니다.

예수님, 이리 오시오.”

내가 갑자기 예수님, 하고 존경어를 쓰고 찢어진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정리하자 모두들 놀라서 이상한 눈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알 수 없는 두꺼운 각질의 껍데기를 쓰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는 벗길 수 없던 껍데기였습니다. 어떤 사람의 충고나 법으로도 그 껍질은 벗겨지지 않던 강하게 씌워진 각질이었습니다.

내가 갑자기 변하니 미친 사람으로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나는 1179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 그동안 내가 무례하게 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예수는 침착하게 좌중을 둘러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무릎을 꿇고 방장님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믿지 않던 분들도 따라 엎드리십시오.”

예수의 위엄 있는 음성으로 사람들은 꿇어 엎드렸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죄 많은 인간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주님의 품안에 안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죄와 허물로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 삶의 의미마저 잃고 방황하고 고뇌하는 우리가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사정을 아뢸 수 있는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굽어보시옵소서. 길 잃은 양의 무리가 엎드려 비옵니다. 사랑을 기다리는 형제가 있고 죄악 중에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탕자 같은 아들이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 감옥의 주인이시고 세상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참으로 기쁘고 기쁜 날이옵니다. 우리를 거느리시는 방장님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은총을 내려 새 사람으로 탄생시켜 주신 역사에 찬송과 영광을 올리옵니다. 지금 임재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의 큰 영광이 방장님 중심에서 떠나지 마시옵고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주님 모시고 영광 돌리다 하늘 보좌에 들어가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주옵소서. 그 동안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모두 육신으로 갚고 감당하기에는 모자랍니다. 이 시간 용서를 빌고 간구하오니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고 주님을 따랐던 도둑에게 영생을 허락하고 구원하신 권능으로 방장님의 죄를 사하시고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제부터 영원히 주님 말씀대로 선한 길 가다가 출옥하는 날 참 사람의 모습을 세상 사람이 다 보고 믿음의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나는 기도를 정성된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방 안의 죄수들을 둘러보며 지난 날 가혹하게 했던 잘못을 사과했습니다.

“1280. 내가 그 동안 잘못한 것을 용서하겠소?”

방장님,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아무 잘못도 없었습니다.”

미안했소. 내가 어리석어서 그런 잘못을 저질렀소.”

이때 말수가 적고 뚱뚱한 몸집의 경상도 사내가 끼어들었습니다.

방장님예. 참말로 얄궂십니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갑니더. 남들은 예배당엘 십 년 이십 년 댕겨도 방장님같이 변하지는 안테예. 거 별난 일도 다 있심더.”

나는 그를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그 사람뿐 아니라 한 방에 있는 죄수들을 모두 내 부하처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모두들 딴 사람처럼 보이고 나보다 나이도 높게 여겨지고 학식도 경험도 많은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308, 잘 들으시오. 나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런 마음을 갖게 할 수가 없을 것이오.”

죄수 308번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농까지 했습니다.

방장님, 억케 된 것 아입니까? 우찌 한 번에 딴 사람이 됐능기요. 얄궂십니더. 하나님이 정말 계신교? 보신교?”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은 엄연히 계시고 그분의 뜻대로 사람을 잡아낚는다는 것을 알았소. 얼마 전 1179번이 말했듯 하나님은 바람 같고 소리 같은 분이오.”

저리 하나님 믿기 쉽다하마 나도 교회 한번 가보고 싶지 않은가.”

죄수 308번은 신기해하는 것이 말로 해서 확실하지만 다른 죄수들은 나를 진심으로 믿어야 되는 것인지 아닌지가 궁금한 눈치였습니다. 인간이란 언제나 겉 사람만 보이기 마련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심어주신 영적 자아는 육체와 혼(마음)으로 싸여 있고 그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혼과 육은 영의 활동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나는 체험으로 그것을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날 이후부터 나에게는 행동의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깊이 갇혀있던 영의 활동을 깨달았습니다. 울지 않고자 해도 눈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감사하게 생각되고 즐겁습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인정이 많고 겸손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익혀 두었는지 모를 만큼 모든 것이 가슴속으로부터 울어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리의 병아리가 탄생하기 위하여 계란은 껍데기를 깨는 기적을 체험하듯이 겉 사람은 깨지고 속사람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껍데기로 버티던 위세며 허구가 모두 사라지고 온유하고 겸손하며 사랑이 가득한 마음이 얼굴에까지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안에는 나를 새롭게 성숙시키는 힘이 있었고 달고 오묘한 교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성경책을 읽다가 덮어 높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죽을 죄인을 벌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10년이 넘도록 저주하며 밑 닦아 버린 죄 천 번 죽어 마땅합니다. 이 보잘것없는 것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경히 여기고 휴지로 삼았으니 어찌 용서함을 받겠습니까. 세상 살 동안 하나님께 지은 죄 세상에 지은 죄 부모님과 형제에게 지은 죄, 영주를 속이고 그 가슴에 한을 안겨준 죄, 용서하여 주옵소서, 칭찬 받을 일은 하나도 해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라도 주님 앞에 용서함 받을 때까지 갚을 수 있는 벌을 내려주옵소서.”

나는 기도를 하면 끝없이 이어져 나오는 지난날의 죄상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 이제 새 생명 얻은 몸

나는 죄수 1179번에게 붙여 불렀던 예수라는 별칭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을 능멸했던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끼리만 이라도 서로 인격을 존중하자는 의미로 서로 불러주기 원하는 이름을 부르도록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 동안 겹겹이 쌓아올리고 자던 담요를 풀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음은 눈에 비늘 한 겹이 가린 것 같고 마음은 가지에서 떠난 낙엽 같습니다. 그 동안 나 혼자 따뜻하고 편히 살자고 해놓은 이 담요를 보시오. 얼마나 못된 짓이었습니까. 그 동안 원망도 많이들 했을 테지만 내가 용서를 비니 용서하시고 담요들을 넉넉히 덮고 깔고 쉬시오.”

혼자 깔고 뒹굴며 쌓아 올린 담요가 20장이 넘었습니다. 한 사람에게 두 장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똑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호강을 혼자만 하려 했으니 하나님께 감옥에 들어서도 더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나는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1179, 이제 당신을 목사님이라고 부르겠소. 괜찮겠습니까?”

, 그렇게 불러주셔도 좋습니다.”

옆에 있던 경상도가 끼어들었습니다.

목사라꼬? 아무나 목사가 되능기가? 신학대학 나왔능가?”

, 신학을 했습니다.”

정말 목사 안수라는 것도 받았는가?”

, 받았습니다.”

그리하믄 정말 목사제.”

, 목사입니다.”

우짤라고 목사가 죄를 지었능교?”

본의 아니게 잘못되다 보니 죄인이 되었습니다.”

목사가 감방에 들어온다는 말 나는 처음 듣는데이.”

목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1179번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내 말보다 목사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부터 방장도 바꾸고 잠자리도 바꾸겠습니다. 뼁끼통 앞에는 제가 자겠습니다.”

아닙니다. 여기는 여기대로의 규율이 있으니까 그대로 해야 합니다. 저는 아무 데고 편합니다. 저는 방장도 할 수 없지만 자리도 바꿔드릴 수 없습니다. 이후에 다른 식구가 들어와도 여기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양을 하고 있을 때 경상도가 또 끼어들었습니다.

그림 참 좋심더. 감옥 안에서 이런 좋은 그림도 보이, 아무튼 기분이 좋심더. 방장님예, 여기는 감방입니더. 하루 선배를 조상같이 모신다카지 않았심니꺼. 다 좋은기로 방장님이 그냥 방장님 하이소. 그리고 다들 목사님 설교 들으면 되잖겠심니꺼. 우이들 생각하십니꺼?”

경상도는 다 돌아보며 빙긋이 웃었습니다.

하나님이 좋기는 좋은기라예. 방장님이 우찌 저래 변했노. 목사님예, 우리도 이제 하나님 믿는 거 생각 좀 해봐야겠심더.”

좋습니다. 이 감옥 안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은 더욱 영광되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곳에는 하나님이 꼭 계셔야 하는 곳입니다. 감옥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쉬라 하십니다.”

나는 이때 교회에서 설교 듣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세상 바람을 골고루 쏘였고 각종 종교를 악용하기 위하여 이것저것 조금씩 알았는데 어떤 종교도 책임 있게 죄인을 부르는 교리는 없었습니다. 모두가 세상에서 바로 살고 죄 짓지 말라는 도덕을 강론하는데 지나지 못합니다. 기독교도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우리의 갈 길을 예비하고 그리고 오라고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나에게 네 짐을 지고 나에게 오너라하고 반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거운 죄의 짐을 지고 방황하며 감옥살이도 하고 도망도 다니고 얼마나 피곤하고 괴로운 인생 살이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부르시는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그 말씀에 내 안에 쌓였던 모든 더러운 것이 무너지고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에게 그 말씀은 구원의 말씀이었습니다.

목사는 나를 만족한 얼굴로 바라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의 변화에 차츰 수긍이 가는 듯했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4시에 깨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부모님 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 악하고 못된 것, 부모님께 한 번도 효도하지 못하고 마음 아프게 해드리다가 오늘까지 왔습니다. 부모님 가슴에 못을 박아 놓고 그 죄를 깨닫지 못하고 원망만 한 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불쌍한 저의 부모님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무엇을 하시든 하나님 아버지 지켜 주셔서 제가 나가는 날 효도할 수 있도록 그때까지 부모님을 보호해 주시옵소서.”

대략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어머님이 아침이면 고단한 몸으로 일어나시고 남의 집들일 나가시었다가 시장 귀퉁이에서 장사를 하시고……. 그러다가 몇 푼 생기면 소박한 웃음을 지으시며 돌아오시는 모습이 선합니다. 어머님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렸습니다. 가는 허리에 깡마르시고 항상 검불같이 약하신 어머님을 나는 한 번도 도와드린 적이 없었습니다. 경찰이 잡으러 오면 오돌오돌 떨면서 자식 잡혀가는 것이 마음 아파 발 딛을 곳을 못 찾던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의 술 주정에 자식들 뒤치다꺼리에 하루도 편한 날 없는 생활을 지금도 하실 어머니. 지금쯤 어머님은 피로한 육신으로 새벽밥을 짓고 계실 터이지 생각하면 새벽잠이 달아납니다.

나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서, 아버님의 주벽이 이젠 고쳐지기를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밤이면 한 방의 죄수들이 다 자고 목사님도 성경을 읽다가 주무십니다. 그때도 나는 성경 읽기에 빠져서 밤이 깊도록 자지 않았습니다. 성경책이 얼마나 재미있고 나를 새 사람으로 새순이 돋듯 마음에 기쁜 사랑의 씨를 심어주는지 그건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방은 작은 교회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새벽이면 기도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숙여 있고 작은 소리로 찬송을 부릅니다. 살벌하던 우리 방은 사랑이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늦도록 성경을 읽고 있는데 가운데 자는 형제가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머리를 만져보았습니다. 열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이 떨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몫의 담요를 모두 그의 위에다 겹쳐 덮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지금 형제 하나가 심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통 당하지 않도록 치료하여 주옵소서…….”

나는 기도도 제대로 못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내 욕심만 부탁했습니다. 그 날 밤 나는 맨몸으로 밤을 샜습니다. 새벽에 1280번이 일어났다가 내가 이불도 없이 떨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병이 났던 죄수에게 지난 밤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죄수는 그것도 모르고 하루 밤을 앓은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무섭고 악하던 방장이 자기는 담요를 덮지 않고 남에게 더 덮씌워 주었다는 말을 듣고 감격의 눈물을 짓는 걸 보았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오. 하나님이 해 주신 일이었소. 나는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옛날대로 악한 방장이었을 것입니다. 아시겠소?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방장님 말씀 고맙습니다. 저도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는 그가 언젠가는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잘 때 한 번씩 기도했습니다. 달달 들볶아대던 내가 잠자는 형제들의 일그러지고 씰그러진 얼굴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원을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좋은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여러분, 꽃이 피어 있는 화단에 벌과 나비가 많이 날아와 꿀을 따먹고 춤을 춥니다. 꽃이 먼저 나비를 찾을까요. 나비가 먼저 꽃을 찾을까요?”

다른 사람보다 말이 많은 경상도가 먼저 대답했습니다.

나비가 먼저 꽃을 찾는 기라예. 꽃이 우이 나비를 찾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모두들 그렇다고 끄덕였습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나비가 꽃을 찾아다니지 꽃이 나비를 찾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데 목사님 설명은 달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꽃이 먼저 나비를 찾아가 초청한 것입니다.”

어떻게 찾아갑니까?”

꽃은 꿀을 준비해 놓고 향기를 날려서 나비가 있는 곳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나비들은 그 향기의 초대를 받고 꽃밭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형제 님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부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부르는 거 봤나. 우리가 찾아가는 기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믿는 것도 하나님의 초청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으면 잔치 자리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형제님 중에는 교회에 안 가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계신 분이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미 초청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다음에 알게 됩니다. 방장님이 교회를 나가게 된 것도 방장님 스스로 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의 초청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를 하나님이 초청하다니 초청 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고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내가 너를 왜 초청하지 않았느냐. 분명히 너는 내 초청을 받고 교회에 나왔느니라.>하는 말씀이 머리를 꽉 채웠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초청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자가 보고싶다. 여자 궁둥이라도 한번 보자.>, 이 마음이 아니면 바위보다 굳고 악하고 강퍅한 내가 교회에서 돈을 준대도 안 갔을 것입니다. 여자에 약했던 나를 그런 방법으로 부르심으로 나는 고분고분하게 가짜 크리스천 노릇을 해가며 교회를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칼에 내 악의 머리를 베어내고 새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껍데기의 굳은 각질을 벗겨내어 태워버리신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큰 화재를 당하여 전신 구석구석이 활활 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 몸은 이제 모든 악이 타서 떨어져나가고 하나님이 새 살에 새 옷으로 갈아입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내 마음의 어느 구석의 한 조각도 나를 이렇게 순한 어린양처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우리 방의 화기에 넘치는 분위기를 안 교도관은 마침내 우리들이 교회에 매주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자기는 불교라 믿지 않겠다고 웅크리고 앉은 형제를 제하고는 거의 반이 교회를 나갔습니다. 나는 교회에 들어가면 천당에 온 것 같고 마음이 즐거움을 못 이겨 찬송을 신나게 불렀습니다. 찬송가 한 곡도 모르던 내가 어느새 많은 곡을 외고 부를 수 있었으며 성경 말씀도 반쯤은 외다시피 되었습니다. 죄수만 가득히 모여서 찬송 드리고 기도드리는 감옥 속의 교회는 옛날 나처럼 가짜도 있을 것이고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죄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도소 구내 교회에 나온 크리스천들은 대게 처음부터 끝까지 울다가 나갑니다. 감옥에 계신 하나님의 역사는 교도관들이 하는 교도행정보다 수백만 배의 일을 하십니다.

나는 교회 안에서 봉사할 일이 많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옛날 같으면 아무데나 침을 뱉고 지나가고 휴지를 버리던 그 곳에서 봉사하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마음이 있어도 아무나 시키지 않는 곳이 감옥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뒤뜰이라도 청소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무엇이나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요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스올의 뱃속에서 토해내게 하였듯이 나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사람은 새 옷을 처음 입었을 때는 길을 가도 조심해서 갑니다. 흙탕물에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흙이 있는 곳에서는 걸음걸이와 발자국을 조심합니다. 흙이 묻을까 염려해서입니다.

앉을 때도 아무 데나 앉지 않습니다. 앉을 경우에는 앉을 곳을 씻고 앉습니다. 옷이 더러워지면 빨아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조심하고 삽니다. 그러나 헌 옷이라고 더러워진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아무 데다 털썩털썩 주저앉고 흙 길이든 먼지 구덩이든 함부로 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옷만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에 때가 묻어 들어옵니다. 정갈하게 입고 조심조심하면 더러운 때가 몸에까지 묻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은 삶에 악의 때가 깊이 묻고 절어들면 그 영혼까지 때가 묻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옷에 때가 타면 빨아 입듯이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은 죄를 그냥 버려두지 말고 기도하고 회개하여 정결하게 씻어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살아온 나는 별 일곱 개를 달도록 세탁을 해 입지 않은 옷이 더러워지듯 함부로 굴러서 큰 죄악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나를 하나님은 불로 지지고 태우고 벗기신 후 성령의 새 두루마기를 입히신 것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이 갈아 입혀주신 옷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빨고 다려 입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멍하니 갇힌 신세로 하루가 지나가기를 세고 있는 죄수들은 참으로 무모한 삶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비로소 내 과거가 얼마나 헛되었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일찍 일어나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성경을 통하여 진리로 영을 밝히며 찬송으로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삶, 그것은 이곳이 아무리 감옥이라도 나에겐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죄수는 누구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에 나가 봉사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하루는 교도관이 나를 불러내어 교회 청소를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얼마나 기쁜지 그 날 교회 구석구석 청소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나는 감사하며 청소를 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잘 했습니다. 그 날 교도관은 나를 지켜보다가 물었습니다.

그렇게도 좋은가?”

, 즐겁고 기쁩니다. 교회 청소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보지.”

그 날 이후 일주일에 세 번씩 저는 교회 청소를 맡아 했습니다. 바닥도 쓸고 의자도 걸레질을 하여 반들반들하게 해놓았습니다.

교회 청소를 몇 달 하는 동안 저는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모범수는 지도를 봅니다. 한 방에만 갇혀 있지 않고 나와서 교도관의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고 손이 모자라는 곳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고 만나는 죄수마다 예수를 믿으시오 하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내가 전에 그랬듯이 모두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깨뜨려 주시지 않으면 쉽게 깨어지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속으로는 나도 하나님을 믿어볼까? 하면서도 겉 사람이 <낯 뜨겁게……. 언제부터 내가……. 체면이 아니지…….> 등등 겉치레에 따른 벽에 가려서 속에 있는 영이 끝내 겉 사람의 껍데기를 벗기지 못합니다. 겉 사람의 오만과 교만, 사회적이고 세상적이기만 한 그 가면을 벗기고 태워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불로 태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잡으러 다니다가 깨어진 기록이 성경에는 길게 씌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극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만 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다가 매를 들어 때리실 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의 노하신 채찍이 우리에게 이르기 전에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십시다.

나와 같이 있는 한 방의 죄수들 중에는 내가 이렇게 달라진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나 16세에 고향을 떠난 뒤 객지로 돌다가 도둑질을 배우고 그러다 잡혀온 죄수가 한 방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의 진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모범수가 되고 지도가 되어 나다니게 되자 그 짓을 하기 위하여 쇼로 기독교인인 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번갈아 가며 교회에 참석했는데 그 사람만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성경 이야기도 통하지 않았고 기도도 찬송가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내가 전처럼 혹독하게 구는 그대로였다면 그런 태도로는 구타를 당해도 많이 당해 묵사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서부터는 아무도 괴롭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새로 입실한 죄수가 다리를 절며 신고를 했습니다. 전 같으면 신고식이 선입자들에게는 큰 흥밋거리였겠지만 나는 신고를 간단히 받았습니다. 선배 죄수들은 그런 내 태도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치렀던 것처럼 땀을 빼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신고식이 시원치 않으면 기강이 해이된다는 이유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의견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새로 들어온 죄수는 입실 후 일주일쯤 되었을 때 다리에 큰 고름집이 생겼습니다. 그는 식사도 제대로 못할 만큼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나는 그를 의료실로 안내하여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치료를 받고 주사를 맞았지만 그 다리의 고름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약으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 부위를 빨아내고 약을 바르면 좋을 것 같아서,

경상도, 네가 입으로 빨아 보면 어때? 그리고 약을 발라 보자.”

방장님. 전 몬합니더. 징그러워 몬합니더. 우이 그걸 쯔쯔…….”

정말 못하겠나?”

죽어도 몬합니더.”

나는 충청도에게 눈길을 돌렸습니다.

충청도, 어때? 자네는 할 수 있겠지?”

못합니다. 그렇게 해서 낫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안 날 땐 할 수 없지만 한번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 해보시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때 목사님이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을 수만 있다면 제가 하지요. 제가 하겠습니다.”

안됩니다. 이 상처는 너무 깊이 곪아서 고름이 한 입은 더 나올 것입니다. 목사님은 안 됩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았습니다. 모두 자기에게 시킬까봐 고개를 돌리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미 아무도 이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마음을 떠보았던 것입니다.

“1280!”

!”

어때?”

…….”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못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님 같은 분이 제자의 발도 씻겼다는데 형제의 아픈 상처를 눈 딱 감고 한번 빨아내어 줄 수 없다는 말인가?”

목사님만 근심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 다른 사람들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 여기에다 종이를 깔아 놓으시오. 환자는 이리 앉고.”

나는 빨아낼 준비를 하고 그 죄수의 무릎 곁에 허리를 숙이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형제의 상처를 치료하여 주옵소서.>

나는 그의 상처를 풀어놓고 입을 꽉 대고 쭈욱 빨았습니다. 고름이 쭈르륵 빨려 나왔습니다. 몇 차례 구역질이 나는 것을 참고 빨아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고름이 나왔습니다. 다들 내가 하는 것을 상을 찡그린 채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다 빨아낸 후 입을 물로 가시고 그의 상처에 약을 정성껏 발라주었습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죄수는 방장이 이렇게 하는 것을 당황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나는 그를 위로했습니다.

미안해 할 것 없소. 빨리 상처가 아물기만 하면 되오.”

그 날 이후 나는 그 죄수의 처지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무는 것을 보며 감사했습니다.

상처 하나가 생겼다가 고쳐지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고 큰 일도 아닙니다. 육신이 병든 곳은 그곳을 치료하는 약이 있고 약이 맞으면 완치가 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병이 든 것은 치료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병든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병든 영적 상처를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발생한 병을 치료하는 약은 성경 말씀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거듭나면 치유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 영적인 병을 치료받는 약을 곁에 두기보다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에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전 같으면 입으로 다 했습니다. 안되면 폭력을 썼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폭력보다는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내 뜻을 이루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길인 것을 알았습니다.

휴 가

나는 법 절차상 마지막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감호 13년 구형 10년으로 다 치르고 출감하자면 61세가 되어야 됩니다.

전과를 많이 가지고 있듯이 나는 재판 경험도 많습니다. 내 재판 남의 재판 너무 많이 보고 듣다 보니 반은 판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과자들은 누구나 자기 죄 남의 죄를 심판하여 징역 몇 년 하고 점을 먼저 칩니다. 거의 백퍼센트 적중합니다. 나는 전에 법정에 나갈 때면 으레 목에 힘을 주고 꼿꼿이 버티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말했습니다.

네까짓 것들이 재판을 하겠다고? 해봐라. 재판 따위는 하나마나 내 죄는 내가 아는데 무슨 재판질이야. 그냥 스스로 몇 년 더 썩다가 나가겠느냐고 물으면 내가 법이지. 정해진 걸 가지고 무슨 재판이야. 저것들 좀 보라지. 가운을 걸치고 엄숙하게 차리는 꼴……. 새파란 것이 무얼 안다고 재판이야. 제 놈들은 숨겨 놓은 죄가 더 많으면서 더러워서 원…….’

속으로 이러니 겉에 어떤 표정이 나타나겠습니까. 자숙하는 태도는 한 점도 보이지 않고 버티는 나에게는 언제나 무거운 형량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시고 재판정에 나선 나는 옛날의 내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겸손히 숙이고 판사 앞에 꿇었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오직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큰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시간을 모두 감옥에서만 보냈습니다. 죄인에게 중벌을 더 내리셔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어차피 저는 제게 주어진 형량대로 살면 일생을 옥에서 보내야 합니다. 옥에서나마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질렀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저에게 피해를 입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그 분들 하나하나 축복해 주시옵소서.”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면서 판사나 검사의 얼굴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살아서 지은 죄도 사람끼리 이렇게 준엄하게 죄과를 받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세상의 재판이 무섭지는 않지만 나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상을 해야 합니까. 그 날 판사는 내 형량을 대폭 줄여 선고했습니다.

감호 면죄, 실형 7.”

고개를 숙이고 심판을 기다리는 내 귀에는 거짓말 같은 판결이 내려진 것입니다. 나는 너무 감격하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모를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렀습니다. 가슴속에 큰 상을 받아든 것처럼 뜨겁고 기뻤습니다. 실형 7! 얼마나 가벼운 형입니까. 수염이 허옇게 나서야 출옥할 각오를 한 나에게 7년이란 너무 짧은 세월입니다. 나는 45세면 나갑니다. 세상에서 떳떳하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다. 형량을 3분의 1로 줄여 주신 하나님은 내가 출옥한 뒤에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나는 하늘을 날 듯한 기쁨으로 돌아와 203호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결과에 대해 궁금해 하였습니다. 경상도가 점친 형량을 말했습니다.

감호 7. 실형 7!”

1280번이 고쳐 말했습니다.

감호 5, 실형 6!”

그 외에도 한 마디씩 했지만 모두가 십 년 이내에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습니다. 나는 자랑스럽게 결과를 들려주었습니다.

감호 면죄. 실형 7!”

!”

모두들 입이 벌어졌습니다. 재판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목사님도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기적이라며 기뻐했습니다.

나는 더욱 열심히 기도했고 찬송했습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혼자 청소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히기로 하고 토목기술을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나처럼 즐거운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들어 있는 방의 죄수들은 충청도 하나 빼놓고는 모두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을 꼭 믿겠다고 약속하고 다른 방으로 옮겨간 죄수도 있고 여러 모양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1984년 여름, 나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모범수에게는 휴가가 주어지고 있었는데 나에게 휴가를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7년 동안은 꽉 갇혀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휴가라니, 꿈에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장님의 배려로 나는 5일간의 특별 휴가 특명을 받았습니다. 203호실 죄수들은 모두 자기가 당한 기쁨이나 되듯이 기뻐했습니다. 경상도가 신이 난다는 듯,

방장님예, 좋겠심더, 형수님이 좋겠심더, 붙잡혀 들어오기도 힘든데 내보내 주거들랑 토끼시오마.”

했습니다. 충청도도 한 마디 했습니다.

죄수한테 휴가가 있다니 믿을 수도 없는 일이며, 방장님 정말 휴가 가십니까? 정말 돌아올 생각이십니까?

, 오지 않고, 꼭 오지.”

목사님도 한 마디 했습니다.

축하합니다. 하나님이 아주 크신 상급을 주셨습니다. 이 안에 갇혀 있는 수천 명의 죄수 중에 몇 명 나가는 특전이라니 부럽습니다.”

목사님은 곧 풀려나실 텐데요, , 하나님은 모든 진실을 밝히실 것입니다.

1280번도 말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었습니다.

방장님,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휴가 즐겁게 보내고 오셔야 합니다.”

그전 같으면 휴가증 들고 나서자마자 곧장 삼십육계를 쳤을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보낼 철창 신세가 7년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옥길이 끝없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길기는 해도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휴가증을 받고 벗어 두었던 사복을 찾아 입고 나올 때 그 감격은 말할 수 없었고 현기증마저 일었습니다. 늙어 꼬부라져서야 세상 구경할 줄 알았던 내가 철문을 당당히 가슴 펴고 나서볼 수 있다는 그 감격은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5일간의 휴가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50년만큼이나 값지고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돌아서서 철창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는 죽음만 있고 절망만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든지 깃을 내리고 있는 곳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그 사랑의 포근한 품을 거절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많이 변한 차도며 시가지를 두리번거리다가 부천행 버스를 탔습니다. 해가 설핏할 무렵 우리 집 창문이 보이는 골목길을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대문 앞에 이르러,

어머니!”

하고 불러 보았습니다. 한참만에 안에서 누가 나오는 기척이 들렸습니다. 혹시 식구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라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대문이 삐걱하고 열렸습니다. 어머니가 나오셨습니다.

어머니! 접니다. 흥규…….”

흥규?”

어머니는 매우 놀라시는 빛이었습니다.

흥규야, 얼마나 고생을 했니?”

어머니, 그간 안녕하셨구요? 아버님 계신가요?”

나는 어머니를 잡고 방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렸습니다. 어머니는 처음 받아보는 절에 반가워하면서도 걱정을 먼저 하셨습니다.

흥규야, 네가 나오자면 십 년도 더 걸린다고 했는데 어쩐 일이냐. 또 담을 넘은 게 아니냐?”

아닙니다. 어머니.”

아니라니, 그럼 어떻게 나왔어? 너 오는 것 본 사람 없었니?”

없었어요. 본 사람이 있어도 괜찮구요.”

얼마나 고생했니? 널 보내 놓고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그런데 아버님은 어디 가셨나요?”

, 저 건너 동네 집 짓는 공사장에 나가신다. 늦어야 오시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아들 노릇도 못하고…….”

…….”

어머니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지셨습니다. 어려서는 날마다 보던 어머니였고, 지금은 오랜만에 뵙는 얼굴인데 남의 어머니처럼 설고 야위어 보였습니다. 큰아들이 이 모양으로 살았으니 집안 형편이 좋아질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 길을 잘못 든 죄가 이렇게 낡아 가는 집을 수리할 능력도 없는 나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못난 아들이 왔는데도 반가워하시며 저녁 준비를 서두르셨습니다. 나는 집안 살림에 많이 설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도와 집안을 치우고 아버님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흥규야, 아버지가 늦으시나 보다. 먼저 들자.”

아닙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요. 오랜만에 온 아들이 식사를 먼저 할 수 있나요.”

그래라,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구나.”

휴가 받았어요.”

휴가라니? 죄수도 휴가가 있다더냐?”

, 모범수에게 주는 휴가예요.”

모범수?”

, 죄수 중에서도 모범수가 되면 특별 휴가를 준답니다.”

그럼 네가 모범수가 되었다구?”

그렇습니다.”

아이구, 세상에서는 가장 못된 것이라고 욕들을 하는데……. 감옥에는 얼마나 못된 사람이 모였으면 네가 모범수냐?”

어머니, 저를 용서해 주세요. 불효자가 드릴 말씀은 그 말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뒤늦게 철이 났습니다.”

철이 났다니 고맙군……. 몇 해나 더 있어야 나오게 되는냐?”

“7년이면 됩니다.”

“7년이나? 그래도 듣기보다는 짧아진 것 같은데…….”

, 많이 줄었습니다.”

에이그, 그 나이가 되도록 장가도 못 가보고 청춘이 늙는구나.”

어머니, 염려 마세요. 제가 나오면 효도해 드리겠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아버님이 오셨고 야간 학교를 다니는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 놀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너 흥규 아니냐? 어떻게 나왔어?”

, 휴가 나왔습니다. 아버님 절 받으세요.”

아버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보시더니 앉으셨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부모님께 불효한 것을 사죄 드리는 마음으로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냐. 다 네 팔자소관인 걸. 그런데 죄수에게도 휴가가 있단 말을 믿어도 되는 거냐?”

, 믿어주세요?”

나는 휴가증을 보여드렸습니다. 곁에 있던 동생이 자세히 보더니

휴가증은 틀림없는데, , 가짜 만들어 가지고 나온 건 아니지?”

하고 웃었습니다. 어머니도 염려스런 얼굴로 말했습니다.

또 잘못된 거 아니냐? 휴가증까지 가짜를 만들어 온 게 아녀?”

아버지도 휴가증을 들고 들여다보시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휴가증은 맞는데…….”

한번 신임을 잃으면 이렇게 되찾기가 힘듭니다. 감옥에 휴가가 있다는 것도 거짓말 같은 사실이긴 합니다. 그 날 밤은 그 동안의 일들을 서로 궁금한 대로 묻고 대답하며 보냈습니다. 동생도 이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점잖아졌습니다. 철창 안에서 생각하던 것보다는 집안 사정이 좋아져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술을 끊으셨고 어머니는 새로 생긴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튿날은 어머니와 둘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뭐냐?”

어머니는 제가 어떻게 해서 휴가를 얻었다고 생각하세요.”

모범수라며?”

, 어떻게 해서 모범수가 되었는지 짐작하시겠어요?”

글쎄, 죄인끼리 모인 데서 모범수가 또 뭔지 난 모르겠다.”

어머니, 저를 모범수로 만들어준 분이 있어요.”

그러냐? 뉘신지 고맙기도 하구나.”

그분이 누구시겠어요?”

누군, 간수나…….”

간수가 아닙니다.”

간수 빼놓고 감옥 안에서 누가 널 도와주겠니? 죄수끼리 도와줄 수는 없을 테고.”

맞혀 보세요. 어머니, 그분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그렇게 고마운 분이시면 은혜를 갚아야지. 그게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어머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하셨습니다.

세상에 별소리 다 들어보겠구나.”

믿어지지 않으시지요?”

누가 네 말을 믿겠니?”

그러실 거예요. 나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시지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있으면 네가 감옥에 가도록 버려두었겠니?”

어머님, 저는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있을 데가 없어서 하필이면 감옥에 계신다더냐?”

제가 드리는 말씀 들어보세요.”

난 하나님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싫다. 하나님이 밥을 먹여 주냐 죽을 먹여 주냐. 부처고 하나님이고 다 안 믿는다.”

어머니는 전에 절에 가시지 않으셨어요?”

절에 가면 뭘 하니. 공염불이지. 자식 잘되게 해달라고 없는 돈 있는 돈 해다 바치고 불공도 드렸는데 너는 철창신세를 지고 있는 걸…….”

어머니, 교회에는 한 번도 안 가보셨지요?”

거긴 뭘 하러 가?”

하나님 만나러 가지요.”

교회에는 하나님커녕 부처도 없더라. 절에는 가서 바라보고 절을 하면 절 받는 금 덩어리라도 있지만 교회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어디다 대고 절을 하니?”

교회에 가 보셨군요?”

간 게 아니고 지나가다 들여다보았다.”

부처한테 절을 하면 부처는 오냐오냐하고 받아주시던가요?”

그것도 아니고…….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을 믿으라고? 너를 감옥에서 풀어 놓아주면 하나님을 믿을까 원…….”

하나님께서 휴가까지 보내주신 걸 보고도 못 믿으시겠어요?”

그건 모범수니까 소장님이 내보내 주신 것이지. 너 감옥살이 하다가 예수에 미친 게로구나.”

그렇습니다. 어머니.”

미칠 게 없어서 예수에 미쳐? 별일 다 보겠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다. 그건 너도 알고 컸잖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참 신앙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종교는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제가 드리는 말씀대로 하세요.”

어머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제 밤 곰곰이 생각해 봤다. 네가 또 도망쳐 나온 게 틀림없다고 생각되었어. 그래 가지고는 엉뚱하게도 하나님이 휴가를 주었다고 구실을 대는 게야. 세상에 감옥에서 휴가 준다는 말을 들어보질 못했어. 네가 도망 나오지 않고 어떻게 집에를 왔느냐 말이다.”

어머니, 저를 믿어주세요.”

믿을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나를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나는 더 설명을 해드려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머니, 제가 휴가 마치고 제 발로 걸어서 감옥으로 다시 들어갈 테니 따라와 보세요. 그리고 휴가가 틀림없다는 걸 믿게 되시거든 하나님을 믿으세요.”

어머니는 그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 곁을 떠나 친구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집을 나서자마자 곧장 시내버스를 타고 진필수를 찾았습니다. 녀석은 한낮인데도 퍼질러 자고 있었습니다.

내가 찾아온 것을 안 그의 어머니는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아들을 깨웠습니다. 그 어머니는 나와 필수가 어울려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흔이 되도록 장가를 못간 못난이가 필수입니다. 어려서부터 불량하게 자랐고 지금도 직업 없이 다니며 어디서 얻어 마시는지 술에 취하지 않는 날이 없는 사내입니다. 나도 감옥에 가지 않았으며 그 신세가 바로 내 신세일 것입니다. 둘이 못 만난 지도 4년이나 되었습니다. 자다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들은 녀석은 잠옷바람으로 뛰어나왔습니다.

? 흥규가 왔어?”

그래 나다.”

야 임마, 어디 가서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어?”

죽었다가 살아 왔다.”

, 고랑 찼다면서?”

찼지. 아직도 채워져 있다.”

나는 팔목을 엇갈려 보이며 그와 악수를 나누고 퀴퀴한 냄새가 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녀석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늙은 어머니께 꽥꽥 소리를 질러가며 일을 시키는 불효자였습니다.

어머니, 친구 왔는데 술 없어요?”

날마다 먹는 술 하루라도 거르면 어디가 덧나냐?”

에이, 장가를 가든지 해야지. . 나가자.”

어머니의 비윗장 긁는 소리가 싫었던 그는 일어나 옷을 꿰어 입었습니다. 나는 냉랭하게 대하시는 그의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과거를 잘못 살아왔고 그 친구에게 해되는 일만 시켜준 나였으니 당연한 보상이었습니다. 우리는 근처 다방으로 갔습니다. 필수는 내가 나돌아다니는 것이 의아스럽다는 듯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토꼈어?”

아니.”

그런데 어떻게 나왔냐구?”

어쨌든 정식으로 나왔으니까 염려 마.”

정식? 죄수가 정식으로 나와? 특사로 나온 거냐?”

아니.”

그것도 아님?”

휴가다.”

휴가? 언제부터 그런 게 있었지?”

얼마 안 돼.”

편리하네. 죄수한테 휴가까지나?”

그래.”

녀석은 아무래도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가증을 꺼내 보였습니다.

이거 진짜냐?”

가짜 같은데…….”

믿기 싫으면 그만 둬.”

진짜 증 같긴 한데…….”

우리는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았습니다. 녀석은 예나 이제나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이 필요한 것인데 하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로 권해야 신앙을 받아들이게 될까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랬듯 아무리 진리를 진심으로 말해도 통할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필수야. 너 몇 살이냐?”

몰라서 묻냐?”

나이만 많이 먹어서 사람되는 거 아니다.”

또 그 소리냐? 우리 집 꼰대가 하는 소리 너한테까지 듣기 싫다. 여물통 자꾸 채워.”

들을 말을 들을 줄 아는 게 인간이야. 나이가 들면 바른 말을 듣는 귀와 바르게 행하는 손발이 필요해.”

충고 마.”

충고가 아니야. 나는 옥에 갇힌 죄인이고 너는 죄인이 아닌 자유인이야. 내가 충고하게 됐나?”

맞어, 죄인도 할 말이 있나?”

그러니까 잘 들어. 죄인이 휴가를 나왔다. 누구 빽이겠니?”

? 네 놈이 무슨 빽이 있었니? 있었으면 벌써 그때 했지.”

너는 빽이 없어서 문제야. 나는 빽의 힘으로 5일 동안의 휴가를 받고 나와서 세상 구경한다 알았니?”

누구냐?”

알고 싶냐?”

빽이면 죄수도 휴가를 준다. 무슨 빽인데 그렇게 막강하냐?”

너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큰 빽인 것 같으냐?”

검찰총장.”

겨우.”

법무부장관?”

아니.”

국무총리?”

노우

내무부장관?”

더 높은 분

그럼 대통령?”

그보다 더 높은 분

대통령보다 더 높으면 누구냐, 하나님?”

맞다. 하나님이다.”

미친 소리. 하나님이 너 혼자만 봐주는 하나님이냐?”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지.”

얼빠진 소리, 하나님을 빽으로 삼고 사는 얼간이가 어디 있냐?”

얼간이는 바로 너야.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또 어떤 분이 신지 모르고 사는 네가 얼간이야.”

너 정신 있냐. 감옥에서 고문당하다가 헤까닥한 거 아냐?”

천만에.”

언제부터 네가 하나님 믿었어? 하나님이란 있지도 않은 상상의 신이야. 그게 빽이라구? 얘가 한참 갔어.”

내가 확실히 휴가 나온 것은 믿지?”

믿을 수 없지. 하나님 빽으로 휴가 나왔다면 절대 거짓말일 테니까. 너나 나나 남의 주머니 털어먹던 것들인데 하나님이 눈이 멀어서 너 같은 것을 빽서 주겠니?”

내가 세상에 나와서 다니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야. 넌 내 사정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세상에는 공기와 바람이 있는 것을 알지?”

알지.”

보았니?”

그게 보이냐. 몸에 와서 닿으니까 있는 줄 알지.”

꼭 보아서 믿을 수 없는 게 많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믿는다. 예를 들자면, 냄새 같은 건 보이지도 않고 있고 만져지지도 않으면서도 있는 줄은 알고 있고, 빛이 있는 것은 알지만 그 빛을 어둡고 밝음에서 구분할 뿐 만질 수가 없듯 너와 나 사이엔 우정이라는 게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한다. 너와 나는 마음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만나고 실없이 얘기하다가 웃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용서도 하고 하잖니? 바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우리 곁에는 보이지 않는 채로 우리를 돕고 있는 존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신 거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존재를 보이시지도 않지만 아무에게나 다 특별 휴가를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에게만 그 계신 증거를 보이신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강퍅하고 둔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어.”

너 예수쟁이 다 됐구나? 감옥에서 예수쟁이로 만들든?”

아무나 예수쟁이가 되는 줄 아니?”

너는 별나냐?”

별나지, 너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은 눈독을 들이고 계시다.”

뭘 먹을 게 있다고 나 같은 걸 찾니?”

성경 말씀에 등불은 어두운 곳에 필요하고 소금은 썩는 물건에 필요하며 의사는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쥐 잡아먹는 소리냐?”

네 마음 문이 닫혔고 너는 네가 알지 못하는 두껍고 깨기 힘든 딱딱하고 질긴 껍데기에 갇혀 있는 거야. 너는 그걸 모른다. 그 껍데기는 아무도 못 벗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모래알같이 많아도 그 껍질을 완전히 벗기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너 개똥철학 하냐?”

나는 네가 깰 때가 다 된 병아리가 알 껍질 속에서 자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너는 그 껍데기를 깼고?”

깼지. 깨고 불에 바싹 태워 버렸지. 그리고 새로운 고운 털이 돋아 예쁜 병아리가 된 아기 학과 같이 되었지.”

미쳤어. 너 이젠 미친 거야. 학커녕 물에 빠진 수탉 같다.”

잘 들어. 너는 지금 알 껍질 속에 갇힌 채 날개도 있고 부리도 다 난 병아리와 같은 나이에 차 있는 거야. 다만 불쌍하게도 그 껍질을 깨고 나올 용기가 없고 또 아무도 깨뜨려주는 이가 없는 거야.”

, 웃기는군.”

내가 너에게 휴가 나와서 들려주는 이 말이 네 껍질을 벗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너같이 거친 껍질에 갇힌 알은 망치나 도끼로 쳐야지 섣부른 도구로는 어려운 거다. 내가 하는 말은 그저 작은 도구로 껍데기 한쪽에 구멍을 내고 가는 정도야. 누가 꽝 하고 쳐서 껍질이 깨지고 네 육신에 날개 하나가 떨어져 나가는 고통스런 매질에 깨어지는 것보다 네 스스로가 깨고 나오면 쉬운 거야. 너 스스로 네 껍질을 벗겨봐.”

점점 웃기고 자빠졌네.”

이놈아, 내나 되니깐 너 같은 놈한테 이런 얘기 해주지, 누가 해주냐? 딴 사람이 말하면 듣기나 하고?”

그건 그려 허허……. 너 사람 다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언제 네가 그렇게 그럴 듯한 말을 배웠지? 감방에서 가르치던?”

감방에서 만난 하나님한테 배웠다. 너는 이제 교회에 찾아가 두 무릎 폭 꿇어 엎드려서 빌어, 그러면 하나님이 네 껍질을 곱게 벗겨 줄 거다. 내 말을 듣고도 따르지 않으면 너는 세상 병원 돌아서 교회에 가게 돼.”

별 개코같은 소리 다 하네.”

어째서 하나님 빽이 제일이라고 하는지는 교회에 가 보면 안다.”

집어치워 임마. 몇 년 만에 만나서 겨우 교회 얘기냐?”

하고 싶은 얘기가 왜 없겠냐? 그렇지만 무엇보다 급하고 중요한 건 친구로서 진심으로 할 일이 있다면 이 말이기 때문에 이 말 먼저 하는 거다.”

고맙다. 생각해 봐서 네 놈이 잘 믿고 제대로 사람된 것 같으면 흉내는 내어 주지. 그런데 너 오늘 오랜만인데 한잔 안 할래?”

술이라면 생각 좀 해 보고.”

술도 끊었냐?”

먹어본 지가 너무 오래 돼서 끊었는지 잘 모르겠다.”

좋아, 꼭 같이 갈 데가 있다. 너를 기다리는 여자가 하나 있지.”

나는 섬뜩했습니다. 누굴까? 혹시 영주는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필수는 차 값을 치르고 영등포로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뒷골목을 내 집 안방 쓸 듯 주름잡던 기억이 새로웠습니다.

흥규야, 넌 행복한 놈이야. 오늘 밤 너는 장가간다.”

?”

그녀만 만나면 너는 오늘 밤 그냥 못 넘어가지.”

뭔데?”

가 보면 알아. 너를 기둥서방으로 생각하고……. 아냐 은인으로 생각하고 사는 여자가 있다구.”

나 같은 걸 그렇게나 생각해 주는 여자가 있어?”

있지. 너 오기만을 기다리고 사는 여자니까.”

누군데?”

가보면 알아.”

자아식, 너 농담 아냐?”

농담은……. 가봐. 네 팔자 고쳐지면 내 팔자도 고쳐지겠지.”

뭔데?”

너한테 미친년이 있다구!”

미칠 게 없어서 죄수한테 미치냐?”

, 너 그 여자 만나면 죄수라고 하지마. 미국 갔다 왔다고 해.”

미국은 어디가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거짓말을 하라구?”

거짓말도 필요에 따라서는 하라구. 그게 덕이 될 때도 있으니까.”

필수를 따라 들어선 곳은 굉장히 큰 고급 술집이었습니다. 그와 나는 한편 구석에 잘 꾸며진 조용한 밀실로 들어갔습니다. 고급 양탄자에 폭신한 소파, 벽을 둘러친 병풍이 한층 아늑하고 돋보였습니다.

필수야, 너 이런 데서 돈 쓸 만큼 두둑한 거야?”

돈 없으면 긋고, 모자라면 너를 인질로 맡기고 가면 되지?”

죄수도 인질이 되겠냐?”

죄수 죄수 하지마.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니까 눈감고 있으라구.”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습니다. 문이 열리고 20세를 갓 넘어 보이는 여자가 깍듯이 숙이고 들어서며 주문을 청했습니다. 필수는 가슴을 딱 젖히고 주인이 직접 와서 주문을 받으라고 거드름을 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시간에 나직이 말했습니다.

, 너 감방에 또 가얀다며?”

물론.”

임마, 이왕 나온 거 토껴.”

뭐야?”

몇 년을 더 썩어야 나오냐?”

“7년만 있으면 된다.”

“7? 다 늙은 할아범이 돼 갖고 나와서 뭘 해 이 번 기회에 나하고 튀자.”

무슨 소리를.”

, 돈 천만 원만 가지고 배 타자구. 해외로 나가는 비밀 루트를 안다구. 그 지옥 같은 감옥에 가서 고생말고 이번에 네 빽 한번만 더 써먹어. 다시 들어가지 말고 바다를 건너는 거야. 너 자유로워 좋고 나는 네 덕에 바다 건너 구경 한번 가서 좋구…….”

돈이 어디 있어서…….”

돈 걱정은 말라구. 너 아직 몰라서 그렇지 네가 필요하다고 하면 당장에 3천만 원도 해 줄 사람이 있다구.”

정신 빠진 놈의 소리. 누가 나한테 그런 돈을 꿔 주냐?”

조금만 기다려봐. 네놈은 큰 횡재를 했다구.”

알 수 없는 소리 그만해.”

돈만 있으면 튈 뜻은 있지?”

없어.”

병신 같은 소리 마. 너 다시 들어가면 7년 썩고, 그때 나오면 아무도 너하고 상대도 않을 거야. 기회는 포착하는 사람의 것이라구.”

안 돼.”

우리 외삼촌이 외항선 선장이야. 돈만 있으면 여기를 떠나고 싶었어. 나하고 튀자. 공소시효라는 거 있잖아. 바다 건너가서 한 십여 년 재미 보다가 콧수염 기르고 건너오면 누가 아냐? 깨끗한 거지.”

그런 얘기 자꾸 하지마.”

나는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아까 네가 그랬지 내 껍질은 내가 못 벗긴다고. 네가 바로 감방이라는 껍질에 들어가 있는 거라구. 거기서 끌어내어 자유스럽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야. 내 진심 알지?”

내가 토끼면 감방이 어떻게 되는지 아냐?”

이번에는 고랑을 바꿔 차는 거지. 소장 이하 간부들이 조기 두름이 되어 콩밥을 먹는 거지. 그런 것 생각하면 넌 자유를 못 얻어.”

이놈아. 마귀 같은 소리 그만 해라. 나를 믿고 나의 빽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풀어놔 줬는데 은혜를 배신으로 갚어? 네놈 뱃속은 한참 우려내야 빨래가 되겠어.”

성인군자 다 됐군. 도둑놈 주제에 무슨 의리고 뭐고가 있어. 잘 생각해 보라구. 기회는 왔으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옛날의 나라면 이런 기회가 없어서 못 써 먹습니다. 그러나 이젠 새 생명 얻은 몸입니다. 옛것은 다 가고 새 생명으로 구원받은 나입니다. 친구가 하는 말은 이제 나와는 상관없었습니다. 감옥도 들길도 그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내가 날개를 펼 수 있는 곳입니다. 나 하나 휴가 주었다가 사고가 나면 나를 믿어주던 웃어른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휴가 제도도 없어질 것이고 모범수들에 주어지는 특혜도 없어질 것입니다. 필수는 내 심중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필수는 또 무슨 말로 나를 꾀일까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저 머리에서 죄를 궁리해 내는 꾀 주머니를 뽑아 버리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들어와 역사 해 주옵소서 하고…….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습니다. 깔끔하고 품위 있게 보이는 주인 여자가 가만히 숙여 보이고 들어섰습니다. 하얗고 갸름한 계란형의 여자. 까만 눈썹과 오뚝한 코, 장밋빛 입술에 미소가 묻어 있는 아름다운 자태, 그녀는 나의 기억에 또렷이 새겨 있는 숙이라는 여자였습니다. 나는 숙아하는 소리를 토해내지 못하고 입을 꼭 문 채 바라보았습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는 순간 곁으로 와락 달려들어 품에 안겼습니다.

선생님, 얼마 만이세요.”

……., 숙도 많이 변했군.”

보고 싶었어요. 어디 갔다 이제 오셨어요.”

멀리.”

미국에 가셨다면서요?”

…….”

미국이 아무리 좋아도 그럴 수가 있어요?”

…….”

나는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갑기는 했지만 더 이상 무슨 표현도 할 수 없었고, 그녀는 나의 목을 끌어안고 머리를 묻었습니다. 그녀의 채취가 향긋하게 콧속 깊이 흘러들었습니다. 옛날과 같이 쑥 내음 같은 신선한 내음이었습니다. 곁에서 바라보던 필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림 좋다. 사진 한 장 찍었으면 좋겠는데.”

숙이라고만 일러주어 그녀가 무슨 숙인지 숙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에게 숙이라는 여자는 잊히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내가 한참 방황하고 다니던 시절. 십 년 전 옛날이었습니다. 그녀는 양동에 있는 어느 창녀 집에 팔려들었던 순 처녀였습니다. 나는 그녀의 첫 남자였습니다. 단골 아줌마가 아다라시가 왔다며 나를 밀어 넣은 방에 그녀가 있었습니다. 귀엽게 생겼지만 촌티를 채 못 벗은 스물 세 살의 촌 색시였습니다. 나는 그녀가 거부하는 것을 쓰러 눕히고 일을 치렀습니다. 설마 순 처녀일까 싶었는데 나에게 당한 뒤 그녀는 엎드러져 슬프게 흐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는 처녀 증명이 빨갛게 젖어 있었고…….

내가 방문을 열고 나서려 하자 엎드려 울던 그녀는 갑자기 내 허리춤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못 가요, 나를 버리시면 안 돼요.”

그 말만 계속하면서 매달렸습니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몇 번 밀어 제쳤지만 안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날 밤

좋다. 네 서방이 되어 주마.”

이 한 마디를 해놓고 밤이 새도록 그녀의 육체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이름을 물었더니 숙이라고만 했고 그 날부터 숙이라고만 불렀습니다. 이 여자는 고집이 어찌나 세었던지 그 다음날부터 나 외에는 아무도 받지 않겠다고 버텨서 주인아줌마가 못 당하고 나에게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주인에게 십만 원을 물고 그녀를 풀어 주라고 했습니다. 그 집에서 풀려난 그녀는 나를 놓지 않고 따라다녔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잘 아는 다방에다 소개를 해주고 거기서 먹고 자며 일하게 해놓고 그녀를 떼어놓았습니다.

다방에 들릴 때마다 필수를 동행하였습니다. 동업자였으니까 필수는 우리 두 사람 관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를 이따금 여관으로 불러 사랑해 주었고 그러다가 감옥살이 신세가 되어 그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십 년이 넘고 보니 그녀도 서른 중반에 접어든 완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하여 이런 술집에 와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든 해야 될 것 같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창녀 굴에 팔려갔던 여자, 어차피 누군가에게 짓밟히긴 했겠지만 나한테 정조를 잃은 여자였으니 그의 순결만은 내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입을 다물고 그녀의 처분만 기다렸습니다. 필수가

그만 해, 너무들 좋아하니까 질투가 나 못 보겠다. 마담, 맥주로.”

숙은 전화기를 들고 주방에다 주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 가슴에 얼굴을 박고 감격을 못 이겨하는 것이었습니다. 잘 차린 안주에 술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셔주기를 기다렸습니다. 숙이 술을 따르고 필수는 좋아서 싱글벙글 받았습니다. 나에게도 잔이 채워졌습니다. 셋이서는 높이 들고 축배를 했습니다. 나는 술을 먹지 않아야지 하면서도 마다하지 못하고 한잔을 받아 마셨습니다. 십 년이 더 지나서 처음 마셔 보는 술이었습니다. 나의 내장은 이제 세상의 기름진 요리나 향기 좋은 술에는 약해져 있었습니다.

나는 두 사람이 내 잔 하나만 더하는 소리를 들으며 맥주 몇 잔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옛날에 스무 병도 하루 밤에 마셔대던 내가 몇 잔 쭈욱 들이킨 맥주에 그만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렇게 먹고 싶던 음식과 맥주를 겨우 몇 잔 마시고 떨어지다니.

나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습니다. 눈을 떠보니 어느 대궐에 들어온 게 아닌가 싶도록 이상한 방이었습니다. 나는 푹신하고 향긋한 침대에 벗고 누웠고 바닥에는 비단 이부자리를 편 그녀가 따로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여기가 어디일까 생각하다가 날이 밝았습니다. 아침이 되자 그녀는 내가 자는 줄 알고 가만히 나갔습니다.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얼마 후 일어나 세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집안을 둘러보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좋은 집엔 들어가 본 일이 없었습니다. 온 집안이 유리알처럼 반질반질하고 기름이 흘렀습니다. 한쪽 벽에는 큰 사이즈의 그림이 걸려 있고 반대편 벽에는 커다란 벽 어항이 물풀을 가득 담고 펼쳐 있었습니다. 물풀 사이로는 이름 모를 예쁜 물고기들이 날 듯 이리저리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넓은 대청 저쪽은 화원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둘레에는 새장이 있었는데 새들이 맑은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나는 천당을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이 집이 천당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침 식탁은 음식이 모두 그림 속의 작품 같아서 젓가락으로 헤집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눈을 피해가며 누가 또 있나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식당에는 부엌일을 보는 50대 아주머니와 아가씨 하나가 있었고 주인은 없는 집 같았습니다. 한참 후에 정원 저쪽에 별채가 있고 거기에 50대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숙은 친절하게 시중을 들며 식사를 권했습니다. 나는 조심해서 음식을 조금씩만 들었습니다. 기름진 것을 많이 먹으면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숙은 이것저것 자꾸만 권했습니다.

진수성찬을 놓고도 사양해 가며 식사를 조심스럽게 마쳤습니다. 식사 후에 그녀는 나를 정원으로 안내했습니다. 작은 연못이 있고 그 곁에 잔디밭이 있었습니다. 가을 햇볕을 받고 노릇노릇 물들어 가는 잔디 위에는 벌레들이 국화를 찾아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평화스럽고 한가로운 풍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잔디밭 가운데 놓여 있는 둥근 테이블에 마주앉았습니다.

선생님. 많이 보고 싶었어요.”

…….”

선생님은 나를 생각해 보신 일이 없었나 보죠?”

?”

예전 같지 않아요. 어딘가 우수에 젖은 것 같기도 하고, 옛날 그 기개는 어디 갔어요?”

죽었지.”

벌써요?”

죽을 건 빨리 죽어야 해.”

너무 싱거워요. 나 많이 변했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세월이 간 것만큼 씩만 변하는 게 사람 아닌가. 세월이 가는데 변하지 않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겠지.”

그런 얘기 듣자고 한 말이 아니에요.”

참 세월이 꽤 흘렀지?”

많이 흘렀어요. 제가 선생님을 만날 때가 언젠데요.”

과거는 잊어야지. 어두운 과거를 오래도록 기억한다는 건 자기 고문이야.”

저는 잊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도요.”

미련하군.”

미련이 아니에요. 제가 지금 어떤 여자같이 느껴져요?”

귀부인…….”

귀부인이 아니에요. 늙은 미혼녀, 노처녀예요.”

노처녀?”

노처녀는 아니었습니다. 이미 처녀는 아닌 줄 아는 처지 아닙니까. 나는 그녀의 처녀를 무너뜨린 죄인입니다. 그래서 처녀 말이 나오면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녀 말대로 늙은 미혼녀가 좋을 것 같았습니다. 이때까지 결혼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집은 누구 집이고 술집도 주인이라고 했는데 그건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숙이는 내 속을 알기나 한 듯 묻지 않는데도 그 동안의 일들을 하나하나 들려주었습니다.

선생님, 제 재산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글쎄.”

옛날에 서울에 잘못 왔다가 서울역에서 깡패한테 붙들려 창녀촌에 팔려갈 때 제 주머니에는 이천 원이 있었어요. 나쁜 놈들한테 속아서 그 집에 팔려갔다가 선생님을 만났지만.”

선생님이라고 하지 마.”

뭐라고 할까요?”

홍일이라고 불러.”

그건 너무 하잖아요.”

그건 가짜 이름이었으니까 이젠 아무렇게나 불러도 좋아.”

진짜 이름은?”

흥규

그럼 좋아요. 홍일씨라고 애칭으로 부르죠?”

그렇게 해.”

지금 저는 부자가 됐어요. 궁금하시죠?”

부자?”

, 2천 원 가지고 서울 온 계집애가 40도 안 돼서 이렇게 좋은 집을 가졌잖아요.”

이 집이?”

, 집뿐 아니에요. 가평에 큰 별장이 있구요. 시내에는 백화점이 또 있구요. 그 술집도 내 이름으로 되어 있구요. 부자지요?”

부자군.”

홍일씨, 지금 무얼 하고 계시죠?”

아무것도…….”

사업하고 싶어요?”

사업은…….”

제가 자금 대드릴게요. 뭐든지 한번 해보세요.”

아는 게 있어야지.”

그럼 우리 백화점 사장?”

안 돼

뭐든 해봐요. 돈 걱정 말고요. 무역회사도 좋구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꿈도 아닌 생시에 무슨 시나리오가 이렇습니까. 숙이는 자기가 얼마나 정결하게 살려고 했는지 그 이야기가 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는 것 같았고 나는 그것이 괴롭게 들렸습니다.

제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요?”

…….”

홍일 씨가 저를 창녀촌에서 건져다 다방에 맡기셨으니 지금의 내가 있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창녀가 되어 있었을 거예요.”

그땐 미안했어.”

아니에요. 난 당신이 좋았어요. 비록 거기서 만나긴 했지만 첫인상이 내 마음에 들었어요. 나에겐 첫 남자였구요. 지금도 그래요. 저는 다방에서 일을 하다가 홍일씨가 영영 나타나지 않아서 필수씨에게 소식을 알아 달랬지만 미국 갔다고만 하고 그만이었어요. 인연이 있으면 만나겠지 하고 저는 어떤 술집 카운터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 술집이 지금 우리 가계에요.”

…….”

그 집은 원래 커서 카운터 책임자가 있고 그 밑에서 제가 심부름을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이었어요. 점잖게 생긴 노신사가 술을 30만 원어치를 먹고 돈이 없다는 거였어요. 무전취식 죄로 걸릴 수도 있었죠. 그때 주인은 펄쩍 뛰면서 외상은 절대 못 한다는 거였어요. 돈을 내지 않으면 잡고 있든지 경찰에 신고한다는 거예요. 그 신사는 자기 주머니에 돈이 있는 줄 알고 마시다 보니 지갑을 사무실에 두고 왔다는 거였어요. 저는 그분을 믿어도 좋을 것같이 생각되었어요. 그래서 제가 책임지기로 하고 그분을 풀어드렸지요. 그 노신사는 나가면서 이 술집 통째로 사면 얼마나 가느냐고 농담 비슷이 말했습니다. 주인은 그때 웃긴다고 생각했는지 30만 원도 없는 주제에 큰소리를 친다고 질책하면서 1억이면 팔지 했습니다. 노신사는 한 마디로 좋소, 딴말 말기요 하고 내일 나한테 넘기시오. 이 집 매입자는 이 아가씨 앞으로 하고, 하시는 거였어요. 그리고 나를 보고 이 술집 사주면 장사 잘 하겠느냐고 웃으며 말했지요. 나는 농인 줄 알고 그럼요 했죠. 그런데 농이 아니었어요. 이튿날 돈을 가지고 와서 외상값을 치르고 나서 내 이름으로 술집을 사서 경영권을 내게 맡겼어요. 나는 놀랐지요. 그래서 농담이었노라 했더니 아가씨도 내 보증을 한번 서 주었으니 나도 아가씨를 믿어보고 싶어서 그러오하고 일을 치렀습니다. 나는 졸지에 큰 술집 주인이 되었지요.

나는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 술집은 내가 경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손님이 배로 늘어났어요. 장사가 잘 되었지요. 나는 벌어지는 대로 그분에게 드렸어요. 그러나 그분은 자기가 운영하는 백화점이 잘 되기 때문에 돈이 급하지 않다면서 통장에 넣어두라는 것이었어요. 통장에는 다달이 예금이 올라갔고 장사는 불일 듯 잘 되었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은 뒤 노신사는 저를 자기 집으로 들어와 함께 살자고 했어요. 이 집이 그 집이지요. 나는 이 집으로 들어와 그분의 수양딸 노릇을 했고 지금 집 지키는 양씨와 아줌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보살펴 주고 있어요.”

그런데 노신사는 왜 안 보이나?”

이 세상에 없어요. 해외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나는 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계속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재산 상속자가 되어 있었죠. 그분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미국으로 이민 가서 없고 부인도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셨어요. 아주 깨끗하게 살다 가신 분이었지요. 나는 의외에 그분 앞으로 나오는 사망 보상금까지 받았어요. 그래서 그분이 하던 백화점을 더 확장했지요. 저에겐 사업자금이 넉넉히 있어요. 사업하고 싶으시면 약간 대 드릴게요.”

유혹의 터널

나는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었고 그녀의 말대로 사업을 할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 날은 그녀와 종일 이런 저런 이야기로 하루를 다 보냈습니다. 유흥업소에서 익힌 교태가 숙의 행동에는 깊이 배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끈질긴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 날 밤은 그녀를 위하여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녀의 연락을 받고 필수도 왔고 우리는 어울려 카바레로 갔습니다. 홀 안에는 수백 명의 남녀가 춤을 추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옛날의 나는 카바레에서 춤 잘 추고 여자 잘 낚기로 유명한 제비족이기도 했습니다. 여자들은 대개 키 큰 남자와 쌍꺼풀의 시원한 눈을 가진 남자를 좋아합니다. 내가 바로 그 스타일에 가깝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컴컴한 자리를 채우고 앉아서 옛날 내 감정은 어디로 갔나 하고 더듬었습니다. 춤추고 마시고 노는 것이 그렇게 좋았는데 그 날 밤의 나는 즐거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홀에서 선남선녀인 양 폼을 잡고 우글거리는 무리들이 모두 독 묻은 벌레들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덤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두가 껍데기를 벗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굼벵이 같았습니다. 굼벵이는 껍질을 벗으면 매미가 됩니다. 매미가 되지 못하고 벌레로 살다 죽는 놈은 끝내 썩고 맙니다. 껍질을 벗지 못한 애벌레 같은 무리들의 꿈틀거림이 비위에 거슬렸습니다.

나도 옛날에는 저와 같이 여자를 잡고 춤도 추었고 술도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속된 것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필수와 숙이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습니다. 멋지게 돌아가고 감각적으로 손과 몸을 비비며 날 새는 줄 모르던 내가 그 짓이 싫고 분위기가 싫어진 것은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허식과 사치와 허영의 껍데기는 하나님께서 다 벗기어 태웠습니다. 내 안에는 오직 성령이 숨 쉬고 인도하고 계심을 재인식하며 그 자리를 지루하게 보냈습니다. 술이 거나해진 필수는 숙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속삭였습니다.

, 어제 밤에 재미 좋았지?”

쓸데없는 소리.”

다 알았지? 숙이가 지금 재벌이라구. 사업자금 좀 뜯어 임마.”

사업은 누구를 위한 사업이냐?”

너 좋구 나 좋은 거지 뭐.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구. 이번 휴가를 이용해서 토껴. 나하고 해외로 나가자구. 숙이도 네가 원하기만 하면 다 들어 줄 거야.”

무얼?”

돈 말이야. 돈이면 다야. 돈만 있어봐. 법도 돈이 가면 구멍이 뚫려 임마. 너 정말 감방으로 돌아갈 생각이냐?”

그래.”

저 애를 그냥 두고 가? 널 서방으로 알고 기다리는 애를 두고?”

다 옛 이야기다. 너나 정신 차려. 사십이 되도록 그게 뭐냐?”

잘난 소리 말라구. 네가 그냥 가면 숙이는 내가 가만 두지 않어.”

가만두지 않으면?”

내꺼 만드는 거지.”

좋을 대로, 죄는 더 짓지 말고 살아라. 내 꼴로 철창가지 말고.”

넌 질투도 없냐?”

질투 같은 건 옛날 벌레 같은 시절 얘기다.”

, 도사 났네. 도사 났어.”

조용히 술이나 들다 가자.”

너도 한잔.”

나는 잔만 받아놓았습니다. 술도 싫고 그런 좌석이 싫었습니다. 숙이 전화를 걸고 온다면서 돌아와 내 곁에 바싹 붙어 앉았습니다.

오늘은 많이 마시고 실컷 놀다 가요. 얼마든지 내가 낼 게요.”

숙이 귀여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잔을 높이 들었습니다. 여유 있게 살아서인지 처녀 때와 똑같이 피부가 팽팽하고 고왔습니다. 나는 시늉으로만 잔을 들었다 내렸습니다.

홍일씨, 오늘은 제가 대접하는 좋은 날이에요. 잔 쭈욱 내세요. 그리고 내 잔 받고요.”

, 들자고 홍일씨.”

둘이 나란히 잔을 들고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또 잔만 들었다 놓았습니다. 숙이 불만스럽다는 듯 눈을 흘겨 뜨면서

제 성의를 무시하기예요? 너무하세요.”

하고 말하자 필수도 거들었다.

이봐, 도사. 그러지 말고 한잔 비우고 이쪽으로 주라구.”

필수는 쭈욱 들이켜고 빈 잔을 내 앞에 내밀었습니다. 나는 담담히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나가서 춤이나 추고 오겠다.”

한 마디 하고는 귀퉁이로 갔습니다. 누가 춤이나 추자고 안 하나해서 턱을 받치고 있는 바람난 여자들이 긴 의자에 닭들처럼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여자들을 둘러보다가 한 사람을 지적하여 데리고 춤추는 군상 속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숙이 내 곁에서 떠나지 않고 고개를 내 어깨에 얹고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나 당신 오래 오래 기다렸어. 알아?”

벌써 그녀의 코에서는 술 향기가 폴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혀도 취한 소리였고 교태를 부릴 때 쓰는 콧소리를 약간 내었습니다.

기다리면 뭘 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당신인데 뭘 하다니이. 당신 난 좋아.”

좋은 것도 끝이 있는 법이야. 이젠 나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좋은 사람 찾아봐.”

진정이야?”

잘 생각해서 살아. 나 같은 건 다시 만날 생각 말고.”

무책임하잖아.”

미안해. 나는 진심으로 숙이를 위해 하는 소리야. 나는 건달이었어. 남한테 못할 일만 시키는 건달.”

건달이 자기가 건달이라는 사람 없어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찾아봐.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수두룩해.”

쌓이고 썩어도 나는 다 싫어. 당신이 좋아.”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와글거리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끼리 즐기기에 정신이 빠져서 그녀가 내 가슴에 파고들어도 보아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머리 냄새를 맡고 있었습니다. 풀 향기 같은 싸옴한 냄새가 가슴에 깊이 흘러들었습니다. 그녀는 손으로 내 깊은 언저리까지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네온사인 불빛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여러 모양으로 요염하게 변했습니다.

나는 잠들었던 악의 세력이 내 가운데서부터 불타듯 뜨거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따스한 볼이 내 턱에 와 꿀 따는 벌처럼 파고들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꼬옥 안아주었습니다. 탄력 있는 가슴이 그대로였고 꽃향기 같은 입김이 내 이성을 혼미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 무대에서는 스트립쇼가 시작되었습니다.

숙이 거칠어진 숨소리로 내 육체를 더듬었습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무대 위의 광경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더 자극적인 여자의 누드가 떠올랐습니다. 구석마다 짝지어 앉은 커플들은 우리의 모양과 비슷한 꼴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러면 안 된다고 몇 번씩 다짐하였지만 육체의 불은 점점 뜨겁게 타고 있었습니다. 뜨거워진 그녀도 남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내 볼에 뜨거운 입술을 가져왔습니다.

필수가 낯선 여자의 손을 잡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금방 만난 사람끼리이면서 연인이나 되는 듯 다정하게 앉아 술을 들었습니다. 숙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에게 춤을 추자고 청했습니다. 나는 마지못해 일어서서 그녀를 따랐습니다. 참 오랜만에 추어보는 춤이었습니다. 추어본 지가 오래 되었지만 한 스텝도 잊지 않고 제대로 밟았습니다. 내 육체는 점점 악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빛 속에 나는 깊이 빠져 있었고 그녀는 내 품에서 행복한 얼굴로 춤을 추었습니다.

나는 <이럴 수가 없어. 도로 벌레가 될 수는 없어. 이 구렁텅이에 빠지면 나는 구원을 받지 못해…….> 등등 생각으로 꽉 찼다가도 그녀의 이끌림을 받아 육체의 율동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자 다들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그녀와 떠났고 필수는 언제 간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자기 침실로 나를 안내했습니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짙은 향수냄새를 풍기며 목욕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목욕을 권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종처럼 욕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평생에 그렇게 좋은 목욕실은 처음 보았습니다. 변소를 화장실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거기서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십여 년 동안 못 해본 목욕을 한꺼번에 다 했다 싶을 정도로 씻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내 잠옷까지 준비해 놓았고 잠자리 날개보다 투명한 연분홍 잠옷으로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얇은 잠옷 속으로 알몸의 선이 투영되고 희고 검은 빛의 강렬한 유혹이 내 육신을 전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잡아당겨 침대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기다렸습니다.

우리는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서로의 육체를 아는 사이였으나 나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선에서 끝나야지 영주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겠다고 생각한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육체의 불을 껐습니다. 그녀는 혼자 애를 태우다 잠이 들었고 나는 무사히 그 밤을 보냈습니다.

무모하게 또 정을 통해 놓으면 그것은 큰 죄악인 것입니다. 일단 영주를 만나 우리의 관계를 정리해야 하고 아들이 얼마나 컸는지 알아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는 숙에게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사죄했습니다.

이해성이 넓은 그녀는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지만 섭섭해하는 빛은 지우지 못했습니다. 아침 햇살이 온 누리를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남은 휴가 기간의 반 이상을 보낸 것입니다. 하루 밤과 이틀 낮이 남았습니다.

숙이의 집을 떠날 때는 언제 오마 기약도 없이 잘 있으라는 인사 한 마디만 남겼습니다. 이젠 내 태도로 보아 그녀대로 새 남자를 찾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옛날에 살던 D동으로 부지런히 달려갔습니다. 영주와 행복하게 살던 그 집이 그대로였습니다. 우리가 살던 이층은 누가 사는지 베란다에 빨래가 너절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나는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대문 벨을 눌렀습니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할머니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누굴 찾으시오?”

죄송합니다. 이 집에 전씨가 살았는데 지금도 사시는지요?”

전씨라?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왜 찾으시우?”

, 여쭈어볼 말이 있어서요.”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사람이 전씨였다지 아마…….”

지금은 어디로 이사 가셨나요?”

글쎄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언제 갔습니까?”

“3년쯤 되었지…….”

“3년이오?”

나는 눈앞이 아득했습니다. 3년 전에 이사를 갔다면 지금 어디 사는지 찾을 수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전 주인은 왜 이사를 하셨답니까?”

사업하다가 부도가 났다던가…….”

할머님은 이 집에서 계속 사셨나요?”

혹시 그 동안에 이층에 누가 찾아오지 않았나요?”

글쎄.”

지금은 이층에 누가 삽니까?”

늙은이 둘 하고 젊은 아들 하나가 살고 있다오.”

전씨는 다시 오지 않았던가요?”

몰라요.”

나는 그 자리에서 어디로 가야 좋을지 막연했습니다. 이층 전세금은 어떻게 되었으며 영주는 끝내 오지 않은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이 착잡했습니다. 허탈한 발길을 막연히 떼어놓고 있자니 문득 동사무소를 가 보자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동회로 갔습니다. 번지를 대고 집주인이 이사간 곳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집 주인은 B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가느다란 희망을 걸고 찾아가 그 번지를 뒤지는데 오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춘천으로 이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춘천 주소를 적어 가지고 허겁지겁 춘천으로 달려갔습니다. 동사무소를 찾아갔을 때는 퇴근 무렵이었습니다. 나는 사정을 하고 그 사람이 이사했다는 번지를 찾아 열람했습니다.

! 나는 울 뻔했습니다. 그분은 또 이사를 한 것입니다. 이번에 간 곳은 황지 읍이었습니다. 춘천서 황지까지는 먼 곳이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무튼 영주의 소식이나 임대료 관계를 알자면 그분을 만나야만 되었습니다. 앞으로 7년 후에 다시 찾는다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결 단

나는 일단 여인숙에 들었습니다. 춘천서 황지까지는 250리가 넘는데 거기까지 가자면 차를 몇 번 바꾸어 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나선 길이니 가서 만나야겠다고 결심하고 일찍 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7시에 떠나는 원주행 버스를 탔습니다. 원주에 도착하니 9시가 다 되었고 거기서 영월행 버스를 930분에 타고 영월 도착이 10시였고 10시 반에 황지행 버스를 탔습니다.

황지까지 가는 길은 너무 험해서 차가 제 속력을 못 내었고 내가 탄 차는 중간에서 펑크가 나서 뒤에 오는 차로 갈아 태워 주어 황지 읍에 도착은 오후 1시가 넘어서였습니다. 허둥지둥 C동을 찾아갔습니다. C동사무소에서 전씨의 주소를 확인했습니다. 그분은 사업에 실패하고 광부가 되어 있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그곳까지는 걸어서 반시간쯤 가야 하는 탄광촌 사택이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경하는 탄광촌이었습니다. 영월서 황지까지 오는 동안 강물이 검다고 생각했는데 황지에 당도하고 보니 골짜기에 흐르는 물이 모두 새까만 색이어서 마치 염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이곳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강과 들을 그리면 냇물을 새까맣게 그린다더니 과연 냇물이 연탄가루로 새까만 색이었습니다.

허술하게 지어 놓은 사택 촌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울서 이층 양옥에 자가용을 굴리던 분이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사나 의심스러웠습니다. 지은 지 오래된 사택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낡았고 환경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지붕도 길도 모두 새까만 마을이었습니다.

130분에 그 집을 찾았습니다. 문을 열고 나온 부인은 옛날 그 아주머니였습니다.

아이고, 누구시여?”

,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어찌 알고 예까지 오셨소?”

찾아서 묻고 물어 왔습니다. 그 동안 평안하셨는지요.”

평안이 뭡니까. 이 지경인 걸요.”

아저씨는요.”

막장에 들어갔다우.”

막장이라니요?”

탄광에 탄 캐러 들어갔다는 말이지요. 일주일씩 교대를 하기 때문에 집에 오자면 앞으로 사흘이나 더 있어야 온다우. 들어오지요.”

부인의 안내로 들어갔습니다. 전에 갖추고 살던 살림살이는 다 어쨌는지 보이지 않고 찌그러진 철제 캐비닛에 이불장이 유리가 깨진 채 그대로 있고 초라하기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싶은 가난한 살림이었습니다. 아주머니도 전과 같이 활기가 없고 노인이 된 듯 힘이 빠져 보였습니다.

아주머니, 어쩌다 여기까지 오시게 되었습니까?”

팔자소관이지요. 사업한다고 하다가 사기를 맞아서 집도 날아가고 몸뚱이만 나왔다우. 올데갈데없는 신세들이 되어 동서남북 안 다녀본 데가 없이 다녔다우. 여기 사는 걸 어떻게 알고 오셨수?”

동사무소에서 주소를 알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 색시는 어쩌고요?”

그 사람 소식이 궁금해서 왔습니다.”

그럼 같이 살고 있지 않수?”

.”

아주머니는 한참 동안 무얼 생각하더니

전에 색시가 댁이 오거든 전해 주라며 편지를 써주고 갔는데…….”

그 편지 지금도 가지고 계신가요?”

이사를 한두 번 다녔어야지. 있는 세간도 다 버리고 다니느라고…….”

안 가지고 계시군요.”

너무 오래서.”

그 사람 무슨 말은 없었나요?”

우리 집이 은행으로 넘어가게 되어서……. 아니지 그 전이었어. 댁에서 집을 나간 지 한 달 만에 색시가 오더니 댁 소식을 묻고 며칠 있다가 집을 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보증금을 내어주었지. 색시는 아기를 데리고 짐을 챙겨 가지고 떠나면서 나한테 편지 한 장을 주길래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부산으로 취직이 되어 간다고 했어요. 부산에 있는 D여중 선생님으로 간다고 하던가?”

“D여중이 틀림없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시계를 보았습니다. 두 시 반이었습니다. 그녀를 찾는 길은 부산으로 가서 D여자 중학교를 찾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황지서 부산까지는 천리 길입니다.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도저히 그녀를 찾아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9시까지는 귀소를 해야 합니다. 귀소 때까지의 시간은 17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따져보면 17시간은 아는 길로 쳐도 황지서 부산까지 갔다 오기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서울까지만 가도 6시간이 필요하고 서울서 부천까지는 1시간, 부지런히 돌아가서 부모님께 인사하면 귀소시간과 맞습니다. 나는 완전히 좌절했습니다. 영주와 한 번만 더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7년 후에 만난다면 서로 얼굴도 잊을 것만 같았습니다. 막연하나마 부산에 있다는 D여중이 유일한 찾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고 아기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허탈한 발길을 돌려 그 집에서 나왔습니다. 부산까지 갈 수도 없고 서울까지 가는 것만도 바쁜 길입니다. 탄광촌에는 어디고 석탄 먼지가 앉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걸어서 변두리 산기슭에 탄가루가 내린 잔디 위에 주저앉았습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산 속 구석구석까지 비치고 있었고 평화롭게 보였지만 오직 나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잔디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빽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저를 감옥에서 구출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이 저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 죄인에게 형기를 단축시켜 주시고 휴가까지 주셔서 이 먼 산 속까지 왔습니다.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를 다 갚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이대로 부산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가슴속 가득합니다. 저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저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죄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하심으로 형기를 마치고 나오는 날 흰눈보다 더 하얀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 주신 분깃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 서울로 가야 하겠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한 죄도 용서하여 주옵시고 부산에 살고 있을 영주 모자도 건강하게 지켜 주시옵소서. 세상에서 살 동안 나를 죽이고 겸손하게 사는 새 사람되게 하옵시고 마귀의 시험에서 건져 주시고 악에서 더 이상 죄 짓지 않도록 성령이 함께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나는 착잡한 가슴으로 엎드려 따사한 햇볕에 등을 대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고요한 중에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우리 곁에서 속삭이십니다.

- 착하고 겸손한 아들아. 네 죄를 네가 씻고자 하니 너의 허물이 너의 믿음으로 씻겨질 것이다. 자기가 지은 죄 값은 남이 갚아 주거나 벗겨주지 못한다. 스스로 벗어야 한다. 매미가 애벌레의 탈을 스스로 벗고 병아리가 그 몸으로 껍질을 까듯 죄를 씻고 선함으로 나가자고 하는 자에게는 죄와 허물의 막이 깨어지는 것이다. 너는 네 믿음으로 너를 구원하였다. 네 믿음 네가 지켜 바른길 가거라 -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시면서 항상 작은 소리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악이 성한 가슴에서는 그 인도하심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씨앗이 심겨 있는 발과 같습니다. 하는 가라지씨요, 하나는 밀알입니다. 주인이 가라지가 좋아하는 비료만 주면 밀은 자라지 못합니다.

나는 40이 되도록 가라지를 키우고 있는 발이었습니다. 가라지를 키우는 거름은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외설 소설이나 외설 잡지 섹스비디오 유흥업소의 누드쇼, 저질 영화 등 모두가 우리에게 가라지를 길러주는 똥 같은 거름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거름만 먹고 가슴에 악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나에겐 그것이 모두 떠났습니다. 한 손에 찬송가 또 한 손에 성경이 세상을 이겨 가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은 밀알을 기르는 거름이 됩니다.

성경이 있는 곳에 양심의 불이 밝혀지고 찬송이 있는 곳에 기쁨의 사람이 넘칩니다. 성경과 찬송가로 무기 삼고 사는 사람에게 악이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납니다. 나는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새까만 냇물을 따라 걸으며 찬송을 불렀지만 아무도 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고 찬송을 받으시며 나를 기쁘게 해주셨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음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이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무도 아는 이가 없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지만 나는 영광 중에 기쁨이 넘칩니다. 그 날 나는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황지를 떠나 서울로 향했습니다. 세상에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도 사랑하는 영주를 따라가고 싶다는 마음도 다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감방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습니다.

황지서 서울까지 가는 차는 여섯 시간 이상 달려야 합니다. 황지는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입니다. 황지 역에서 차표를 사들고 먼 준령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시원할 만큼 산봉우리가 첩첩이 수그리고 있습니다. 그 고지대에서 바라보면 1,5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 또 하늘 높이 솟아 있습니다. 그 높은 지대에서 더 높은 산이 있고 그 산 더 높이에는 구름이 떠갑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잡혀 보기도 했습니다.

인간끼리도 낮은 사람이 있고 그 위에 높은 사람, 그 위에 더 높은 사람이 있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아무 쓸모가 없는 한 줌의 흙이 되고 맙니다.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 100년도 못되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아옹다옹 몸부림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양을 내려다보시면 그것이 어떤 것으로 보일까.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죄를 짓고 싸우고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들의 역사인데 그것이 다라면 삶이란 너무 허망하게만 느껴집니다.

나는 높은 봉우리 위로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다가 거기에 마음을 싣고 고원을 날아보는 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차가 도착했습니다. 앞사람들의 뒤를 따라 올라 좌석에 앉았습니다. 내 옆 좌석에는 스물여덟이나 아홉쯤으로 보이는 처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자를 젖힌 맞은편에는 60이 넘어 보이는 영감 한 분과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기차는 긴 터널을 빠져 나와 파도처럼 펼쳐진 산들을 돌아 밑으로 달리기도 하고 높은 봉우리가 첩첩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계곡을 감아 돌며 흘러내리듯 달렸습니다.

네 사람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제각기 무슨 생각인가에 젖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습니다.

젊은 사람은 어디까지 가시우?”

서울까지 갑니다. 아주머니는요?”

원주까지 간다우.”

아주머니는 내 곁에 앉은 아가씨에게도 시선을 던졌습니다.

아가씨도 서울까지 가시우?”

.”

아주머니는 내친 김에 곁에 앉은 영감에게도 물었습니다.

댁은 또 어디까지 가시우?”

제천까지 갑니다.”

영감이 제일 먼저 내리고 그 다음 내가 내리겠구려. 많이 먹으면 먼저 죽는 것처럼 우리 넷 중엔 영감이 먼저 내리고 내가 내리고 젊은이들이 뒤에 남고 꼭 명을 타고 사는 것 같구려. 나는 젊어서부터 기차를 타든 버스를 타든 옆 사람과 나란히 앉으면 누군가 먼저 내리는 걸 보면서 부부나 친구들이 정답게 지내다가도 명이 다하면 제가 내릴 정거장에 도착해서 내리듯이 하루도 더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우.”

영감님은 빙긋이 이를 보이고 웃다가 입을 다물고 곁의 아가씨도 웃는 듯하다가 눈길을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또 기차가 레일을 달리는 소리만 가을 계곡을 울렸습니다. 아주머니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눈치인데 말거리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든 한판 벌이고 떠들고 듣고 하면 기차는 멀리 가는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기차 역 하나를 지나면서 역 옆에 세워진 교회를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요새는 교회가 너무 기승을 부려서 탈이어. 난 통 마음에 안 들어.”

하고 곁에 있는 영감에게 동의라도 하라는 듯

안 그러우? 그렇게 생각하시잖수?”

아가씨는 그렇지 않우?”

아가씨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굳은 표정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는 어떻게 생각하시우. 내 말이 맞지 않수?”

나는 잠시 후 나직이 대답했습니다.

교회가 아주머니께 피해를 드린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교인들 하는 꼴이 못 마땅해서 그런다우. 하나님을 믿으면 집에서 저나 믿으면 됐지 이 사람 저 사람 끌고 다니고 믿어라 믿어라 하니 될 말이우? 착한 행동으로 도를 닦으면 되는 것이지 꼭 교회를 가서 빌고 노래를 해야만 된다우?”

아주머니는 무슨 이야깃거리든 하나 들추어보자는 것이 결국 교회가 눈에 띄자 속에 품고 있던 교회에 대한 불만이나 실컷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는 심산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넷이 앉아 있으면 그 중에 하나는 크리스천입니다. 공동묘지를 가 봐도 십자를 새겨 세운 비석이 거의 반은 됩니다.

나는 아주머니의 말에 누가 어떤 대답을 할까 기다렸습니다. 기차 소리만 계속될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는 약간 불만스러운 듯

영감님은 예수꾼이우?

하고 물었습니다.

아니오.”

그 대답으로 영감님 입은 딱 다물어졌고 대화는 끊어졌습니다. 아가씨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무언가 한 마디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얌전한 몸매의 아가씨는 나직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어떤 종교를 가지고 계신가요?”

나야 종교랄 게 있나……. 절에 가면 절하고 만신 만나면 굿하고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했지.”

목사님을 만나 보신 적은 없구요?”

만난 적이 몇 번 있긴 했어도 그분들한테는 말 걸기가 싫더라구.”

왜요?”

스님이나 만신처럼 느껴지지 않고 이상해서…….”

교회는 가 보신 일이 있나요?”

육이오 때 구호물자 타러 몇 번 가보았지만 나는 교회 안에 들어가 본 일은 없어.”

구호물자 받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생각은 무슨 생각. 거저 준다니께 타다가 쓰느라고 갔지만. 그게 뭔지나 알았나.”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었어요. 육이오 때 옷이며 우유 등을 지원 받고 굶주림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그 많은 물자들이 어디서 났는지 아세요?”

글쎄, 미국서 왔다지.”

미국서 누가 보낸 줄 아세요?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각 교회와 선교 단체에 헌납한 것을 모아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돈이나 물건 아까운 줄 몰라서 준 것이 아니고 그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자기들 쓰는 것을 줄여서 보냈던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기 원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 바로 그런 증거입니다.”

아주머니는 아가씨의 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전혀 입을 열 것 같지도 않던 아가씨가 보기답지 않게 어른 소리를 하는 바람에 당황한 것입니다.

아니, 아가씨는 웬 말을 그렇게 잘 하시우? 목사님이우?”

아니에요. 저는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는 학생이에요.”

학생이라면 너무 늙었구랴. 그 나이면 애어머니가 돼도 여럿 두었을 텐데……. 이제 학생이라니…….”

아주머니는 그렇게 나이 많은 학생은 처음 만난 모양이었습니다. 나 역시도 노처녀가 신학교 다니는 사람은 처음 만나 보았습니다. 아주머니는 한참 동안 잠잠히 있다가 물었습니다.

아가씨, 아니 학생. 교회 다니는 사람들 말이우. 꼭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해야만 천당 간다우?”

아주머니, 교회라는 건 성경 말씀에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작은 지성전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몸이 바로 교회지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 몸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그 귀한 몸을 함부로 굴려서도 안 되고 더럽혀서도 안 되는 거예요. 꼭 교회를 가야만 천당 가느냐고 물으셨으니 제가 아주 쉽게 설명해 드릴게요.”

천당 가는 길을 말이우?”

, 천당 가는 게 소원인 사람은 천당 가는 표를 사야 하고요, 표를 샀으면 천당 가는 정거장에 가서 차가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암 그래야겠지.”

아주머니가 아무 데서나 믿으면 되었지 굳이 교회에는 왜 가느냐고 하셨지요?”

그랬지.”

기차표를 산 사람은 누구나 기차를 탈 권리가 있어요. 그렇지요?”

그러나 그 차표를 가지고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기차 길에 서서 타겠다고 한다면 타지나요? 기차가 와야 타잖아요? 기차 시간이 되어야 그 표가 소용이 있는 거예요. 기차도 안 오는데 표만 사놓고 탈 수도 없지만 기차표를 안 사고 기차가 왔다고 하여 탄다면 그것도 안 됩니다. 그렇지요?”

그렇지.”

기차표는 차가 도착하기 전에 사야 됩니다. 기차가 지나간 다음 사봐야 모두 소용없는 일이에요. 반드시 기차표는 타야 할 시간 전에 미리 사야만 되고요. 그 표를 가지고 기차역에 가서 절차를 밟아야 되겠지요? 표가 있으니까 아무 데로나 들어가 타고 아무 데서나 손들어 세워 타는 것이 아니듯이 천당엘 가고자 하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시간의 기차가 당도하기 전에 표를 준비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거예요. 그 천당 가는 기차표는 교회에서만 팔아요. 믿음이라는 기차표를 산 사람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법칙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절을 익히고 죽음이라는 기차가 오기 전에 모든 준비를 하는 거예요. 혼자 좋은 일 하고 혼자 찬송하고 혼자 믿으며 혼자 착한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세상에서 남과 더불어 살았으면서 천당에 혼자 가서 혼자만 산다면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천당에 갈 사람은 세상에서 천당 백성의 수련을 쌓아야 하고 친구도 함께 가서 즐기자면 그 사람도 데리고 가야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전도도 하고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아주 그럴듯하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원체 말을 잘해서 탈이야.”

이때 나도 끼어들었습니다.

아주머니, 말 잘해서 탈이 될 게 있겠어요. 말이야 잘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지요. 말을 못해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이때 맞은편 영감님도 한 마디 했습니다.

저 색시 말이 맞소. 우리는 먼저 태어나서 먼저 늙기만 했지 철이 들지는 못했던 것 같소. 저 젊은 사람들은 앞이 창창한데도 벌써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무얼 했소? 가만히 생각하니 교회라는 게 그냥 있는 게 아닌 것 같소.”

아가씨가 영감님을 밝은 얼굴로 바라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선생님도 하나님을 믿으세요.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꼭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하기 때문에 영혼이 가야 할 곳을 예비하셔야 합니다.”

나는 아가씨가 너무 당돌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영감님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영감님은 노기를 띨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너그럽게 말했습니다.

색시, 영혼이 있기는 있다요?”

흔히들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성경에 육체는 살다 늙으면 죽어서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라고 되어 있어요. 땅에서 왔으니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야 하고 우리의 영은 하나님이 보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자면 마음 깊이서 그건 안 된다 하고 깔리는 양심이 있지만 이익이나 감정을 못 이겨서 그것을 떨쳐 버리는 생각이 그 사람을 뒤집어씌웁니다. 그래서 원래의 자기 맘은 양보를 하고 욕심으로 일어난 생각이 앞장서서 일을 저질러 놓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이 본래 주신 영이고 생각은 환경에서 부딪치고 얻어지는 느낌이 일어나서 활동하는 겉모양입니다. 본래의 마음이 하자는 본심대로 사는 사람은 다 착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대로 사는 사람은 악한 일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가끔 남이 보는 데서 울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자기도 걷잡지 못하게 눈물이 펑펑 쏟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건 생각이 우는 게 아니고 영혼이 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이 하는 일이고 그 줄기가 곧 하나님의 성령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을 우리는 수시로 합니다. 그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다 하나님의 영이 처음부터 사람의 속에 주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교회 가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본심은 아주 작은 소리로 교회에 나가면 좋을 텐데…….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바로 겉 사람 생각이 세상 사람들이 비웃겠지, 안 믿던 교회는 왜 새삼스럽게 찾아, 교회가면 술도 담배도 못 즐기고 세상 낙도 즐길 수 없는데…….’ 하고 큰 소리로 가로막는 것은 생각입니다. 사람은 하나지만 마음과 생각은 둘로 갈려서 항상 싸웁니다. 마음의 바탕이 생각을 이겨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하여 사람들은 교회에 가고 거기서 그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교회 문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이 주제넘게 말이 길어졌습니다. 용서하세요.”

아가씨는 어느새 목사님이나 된 듯 열을 내어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과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먼저 속사람이 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위치만 나라는 신학자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것을 저는 기억합니다. 주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첫째 속사람이 깨어져 있어야 합니다. 속사람이 깨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은 활성을 띠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깨어지지 않은 경우 그가 영리한 사람이면 그가 하는 일은 그의 지성의 지배를 받게 되며 만일 그가 감정적인 사람일 경우에 그의 활동은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언뜻 보기에 처세에 성공한 것같이 보이지만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의 영은 그 자신의 사상과 감정의 옷을 입고 나올 것이며 그 결과는 잡되고 순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일을 약화시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의 영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 앞에 사용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그의 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속사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그들이 속사람이 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 거하셔도 풀려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의 겉 사람이 활동을 하는 데도 속사람은 가만히 있습니다. 이럴 경우는 속사람이 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 보면 설교 내용이 굉장히 좋은데도 조금도 감동이 되지 않고 훌륭한 설교라는 평가만 내려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설교 내용은 별로 다른 점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크게 은혜가 되어 가슴이 뜨겁고 기쁨이 넘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일치할 때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속사람이 먼저 깨어져야 겉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녀의 긴 이야기에 지친 아주머니는 어느 틈에 잠이 들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입을 벌린 채 잠이 들어 부끄러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깨우지 않았고 기차는 영월에 도착했습니다. 기차가 서도 아주머니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곁의 영감님은 우리에게만 잘 가라는 인사를 남기고 내렸습니다.

기차는 계속 달렸고 아가씨도 이젠 창 밖에 눈을 돌린 채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침까지 흘리며 주무셨습니다. 나는 그 짧은 순간의 일들을 보며 휴거를 생각했습니다. 잠만 자던 아주머니가 깨어났을 때 영감님이 어느 틈에 내린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인간은 잠들어 있고 휴거의 날은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하신 말씀을 음미하며 아주머니의 자는 모습과 자리를 떠난 영감님 생각을 했습니다.

잠자는 사람은 저렇게 생긴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입을 헤 벌리고 자면서 자기 얼굴이 얼마나 천하고 추하게 보이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침이 흘러나와도 닦지 않습니다. 잠이 들어서 그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잠든 사람은 그 생각하는 것들이 남기는 더럽고 추한 죄과의 벌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든 아주머니가 잠에만 빠져 있든 세상 재미에 빠져 방탕하면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나는 한 시도 자지 않고 산천 구경을 했습니다. 지루한 시간이 흐른 다음 아주머니의 목적지 원주가 가까웠을 때 내가 깨웠습니다. 아주머니는 깨어서

아니 벌써 원주여?”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안 깨워드렸으면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고마워요. 젊은이.”

아주머니는 옆자리를 보면서

영감은 어디 갔수?”

내리셨습니다. 영월서요.”

어느 틈에 영월을 지나 왔나? 인사도 없이 내렸어?”

달게 주무시니까 그냥 내리셨습니다.”

섭섭하구먼.”

아주머님, 세월이 기차만큼 빠르게 지나잖아요. 세월 다 가기 전에 교회에 나가세요.”

생각 좀 해보고. 아까 저 색시 말이 내 맘에 들었어. 교회 가는 것 반대는 않겠어.”

곁의 신학생은 내 얼굴을 힐끔 보고 웃어 보였습니다. 몇 시간을 기차가 달리는 동안 이젠 평지에 다 왔겠지 싶어 보면 또 산 저 아래로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또 왔다 싶으면 그보다 낮은 계곡이 들여다보였습니다. 아가씨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나는 죄수입니다.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 한 나는 내가 먼저 잘난 체하고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잠언의 말씀들을 되새김질하듯 마음에 떠올리며 긴 여행을 했습니다.

차창으로 비치는 파랗고 높은 하늘이 아름답고 단풍이 빨갛고 노랗게 물든 산봉우리와 계곡이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곱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신 한 모든 것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나는 밤늦게 집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동안 걱정이 크셨던 것입니다. 버린 자식이라고 마음속으로 포기했어도 막상 집을 나가 이틀씩 소식이 없으니 염려가 되신 것입니다.

난 또 잡혀간 줄 알았다.”

잡혀 가긴요. 어머니, 더 잡아갈 곳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네가 휴가 나왔다고 하긴 하지만 그걸 내가 어떻게 믿겠니. 아버지도 염려를 많이 하시더라.”

죄송합니다. 저는 떳떳하게 휴가를 받았고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는 돌아갑니다.”

그렇구나. 그 동안 무얼 하다 왔니?”

만나 볼 사람 만났지요.”

내일 들어가면 언제 나온다구?”

“7년 후에 나옵니다.”

“7년을 어떻게 기다리니?”

군대 한 번 더 갔다고 생각하세요.”

청춘은 다 늙고?”

그래도 감사한 거예요. 제가 멋대로 살았더라면 저는 환갑이 넘어야 나올 뻔했어요. 그리고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 불에 타는 형벌을 받을 뻔했습니다.”

장가는 언제 가냐?”

다 하나님이 해 주실 거예요.”

또 하나님이냐?”

어머니, 제가 없는 동안 하나님 잘 믿고 계셔요. 교회에 가셔서 저를 위해 기도도 해 주시고요. 7년형을 받고 살지만 모범수에게는 특사라는 기회도 있어요. 저도 모범수의 본을 보여줄 거예요. 어머니도 제 청을 들어주세요.”

뭘 아는 게 있어야 교회엘 가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가셔야 하나님이 어여삐 여겨 주세요.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과 친해지기가 힘들다구요. 하나님을 지식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철학이나 어떤 학문으로 저울질하는 것이 다 누군지 아세요?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세상 지식이 필요 없어요. 세상 지식은 세상 사람이 만들어 놓고 자기 편한 대로만 해석하고 사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처음에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악도 모르고 미움도 모르는 선한 사람을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지식이 필요 없었어요. 배고픈 어린이에게 사과를 주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먹을 줄 알듯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교회에 가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받아먹어야 하는 건지 알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바로 진리며 우리들 속에 누구에게나 영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영이 살아나고 일하게 해 주면 인간은 딴 사람처럼 되는 거예요. 어머님은 다른 잡신들을 모시기에 마음을 열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어머님 속에서 일을 못하고 계셨던 거예요.”

나는 잘 모르겠다. 너만 잘 된다면 어딘들 못 가겠니.”

어머니, 내일 아침에 저하고 같이 교도소에 가 보세요. 제가 제 발로 교도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보세요. 잡혀서 들어가는 것과 제 발로 돌아가는 것과는 의미가 달라요. 그러시고 저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시고 구원을 받으세요. 아버님도 교회에 나가시자고 하시고요. 세상사는 것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모양은 각각 달라요. 저 같은 죄인도 살려주시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이신데 어머님같이 착하고 선량한 분이 교회에 나가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저도 감방에 들어가면 우리 집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동생도 모두가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가족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겁니다.”

나는 어머님과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나님을 믿으시도록 권해 드렸습니다. 내 식구부터 구원시키고 남을 구원시켜야 옳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감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고 진정한 새 사람이 되어 세상에 나오도록 하리라 결심했습니다.

법이 아무리 잘 되어 있고 엄하다 해도 법을 지켜야 할 사람이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법보다 중요한 것은 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세상 법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법이 아니고 사람끼리 정한 법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법입니다.

내가 일찍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법을 지켰더라면 나는 별 일곱 개씩 달고 다니는 죄인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법을 제정하여 놓고 지키기를 강요하기 전에 하나님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먼저 할 일입니다. 세상에는 파출소가 많지만 파출소 열 개보다 교회 하나를 더 세우면 세상은 열 배 이상 아름다워집니다. 파출소는 사고가 난 다음 인간의 법으로 처벌하고 해결하는 곳이지만 교회는 사고가 나기 전에 예방하는 곳입니다.

파출소가 많고 경찰이 많은 것은 그만큼 약해진 사회를 뜻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그 사명을 다하기만 하면 세상에 경찰서나 감옥이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튿날 일찍이 집을 나섰습니다. 아버님께 인사를 드렸고 동생에게도 성실하게 살며 하나님을 믿도록 권하였습니다. 입소 시간을 아는 필수가 일찍 왔습니다. 어머니와 필수를 동행하고 나는 교도소로 향했고 어머니는 침울한 표정으로 말이 없으셨습니다. 농담 잘 하고 말 많은 필수도 이 날은 과묵했습니다.

교도소 대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휴가증을 반납하려고 꺼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서서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나는 입구에서 어머님의 손을 꼬옥 잡았습니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습니다. 필수도 침통한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님 손을 잡은 채 나직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귀중한 휴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닷새 동안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 감옥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오니 여기 계신 어머님을 불쌍히 보시고 그 영혼을 잠에서 깨워 주시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쁘게 항상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죄인 중에 죄인 된 아들이 어머님 가슴에 못을 박은 큰 죄를 다 용서하시고 어머니의 아픈 가슴의 상처를 안수하고 위로해 주옵시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지켜주시옵소서. 어리석은 것 많은 죄 지은 대가를 형량대로 충실히 받고 칠 년 후에 할렐루야 찬송하며 이 철문을 나설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시옵소서. 저를 두고 돌아서실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저로서는 위로 드릴 힘이 없습니다. 다시는 어머님 가슴에 못 박는 일 없게 하시고 삶이 어려워도 하나님 잘 섬기는 어머님 되게 하옵소서. 또 함께 온 친구 필수를 하나님 친히 살펴 주옵소서. 세상을 자기 뜻대로만 살아온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어서 그 마음속에 있는 악을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살아 역사 하는 새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 적으로 생각하면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고 달아나 살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하오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고자 애쓰는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이제 우리의 헤어짐이 하나님 앞에서는 새로운 만남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믿고 사는 모든 백성을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어머님은 울고 계셨고 필수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마지막 악수를 하며

흥규야, 네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았다. 나도 하나님 믿고 사는 옳은 사람 되도록 노력하겠다. 어머님도 내가 때때로 돌봐드릴 테니 건강한 몸으로 칠 년 후에 만나자…….”

그저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나는 철문 안으로 들어서서 어머님과 친구가 무거운 발길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식구를 구원하여 주옵시고 친구와 그 가정을 구원하여 주옵소서. 7년 동안 밝은 모범수로 봉사하며 무거운 짐 다 벗도록 축복하여 주시고 이 세상 다 살고 천당에 열린 문 들어가서 무거운 짐 다 내려놓을 때까지 지켜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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