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사람 69 / 남자가 아니잖아!
서울역 출발 16시 9분 차 출발 10분 전.
내 옆자리에 청바지 상하의에 까만 운동모자를 쓴 젊은이가 급히 오더니
종이 백을 던지듯 툭 던져놓고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승강대유리문 밖으로 나갔다.
매우 급한 전화를 할 일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 종이 백을 힐끔 보니
무엇인지 가득 들었다.
차 떠나기 10분 전에 나간 사람이 차가 떠나고
20분이 지난 영등포 역에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된 거야?
입석표 승객이 와서 자리를 들여다보고 지나간다.
혹시 빈자리가 아닌가 해서다.
그럴 때 이 청년이 오지 않으니 안타까웠다.
종이 백을 놓고 어딜 간 거야?
차가 안양역을 지났을 때 새까만 모자에
하얀 영문자가 쓰여 있는 모자의 주인이 들어왔다.
그가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내가 고개를 들고
“어딜 갔다가 이제…….”
하고 물으려다 상대의 눈과 마주쳤다.
예쁜 여자 눈이었다.
‘이 사람, 남자가 아니잖아?’
그래서 물었다.
“남자요? 여자요?”
상대가 겸손히 인사 겸 대답했다.
“죄송해요. 급한 전화가 있어서 밖에 나가서 전화를 하고 오느라고…….”
목소리도 얌전하고 맑고 갸름한 얼굴에 몇 개의 죽은깨가 있어
더 예쁘게 보이는 여자였다.
“난 남자인 줄 알았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시군요. 어디까지 가시나요?”
“평택까지 가요. 아이들이 거기서 기숙을 하고 있어서
몇 가지 가져다 줄 것이 있어서 가는 길이에요.”
“서울 사시는군요.”
“예, 방배동에 살아요.”
“거기 부자 동네지요?”
“남들은 그렇게 말하지만.”
“부자들은 책을 안 보지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내가 가방에서 <개나리 울타리>를 꺼내어 내밀었다.
“이런 책 보셨나요?”
“못 본 책인데 휴대하기 좋게 작고 예쁘네요.”
“모양만 예쁜 게 아닙니다. 독서 좋아하세요?”
“네. 저는 시간 날 때는 언제나 독서를 해요."
그러면서 자기 가방을 열었다.
"보실래요. 제 가방은 책이 주인이에요.”
“그렇습니까? 내 책 받으시고 그 책도 보여주실래요?”
젊은 부인은 가방에서 스님이 쓴
명상록 을 내밀었다.
“스님이 쓰신 책이네요. 불교신자신가요?”
“아니에요. 전 기독교신자입니다.”
“그런데 스님이 쓴 책을?”
“이 책 저 책 읽다 보면 종교와는 상관없이 명상할 수 있는
수양서적이 손에 잡히더라고요.”
“좋은 취미를 가지셨네요.
얼굴도 고우시지만 마음은 더 구우십니다.
제가 드린 책은 명상하고는 거리가 먼 세상 이야기입니다.”
부인은 울타리 목차를 들여다보더니 내가 쓴
‘발행인이 드리는 말씀’을 차분히 읽고 나서 말했다.
“이 발행자 말씀이 옳아요.
우리나라는 스마트 폰 때문에 사람들이 책을 안 읽어요.
지금은 이런 분도 있어야 해요.”
이렇게 몇 마디 하는 사이 10분이 지나고 나는 수원서 내리고
젊은 부인은 평택으로 향했다.
무슨 이야기든 더 나누고 싶었지만 야속한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인상 좋은 예쁜 부인이 인사를 얌전하게 했다.
나는 인사를 받고 차에서 내려 돌아오며 생각했다.
부인이 ‘이런 분도 있어야 해요’ 하는 한 마디.
아! 얼마나 감격스럽고 소중한 소린가.
나는 그 자리에서
‘내가 그 머리말을 쓴 발행인이요’ 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그분은 나한테 실망하여 감정이 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서였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이 겨우 이렇게밖에 안 돼?’
하고 실망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독자는 글 쓴 사람을 몰라야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평소에 해 왔다.
글로 보면 작가가 매우 훌륭한 인물로 존경됐는데
작가의 실상과 행동거지나 외모를 보고 실망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글 쓰는 사람은 삶이 바로 그 글이 되어야 한다.
인간성이 개 같은 인물이 입만 열면 남보고 ‘인간이 먼저 되라’고
어쭙잖은 충고를 하는 사람을 보아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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