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속의 아이들. 4 / 분유 먹고 죽은 아이
서랍속의 아이들. 4 / 분유 먹고 죽은 아이
날마다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우유죽을 끓였다.
미군이 트럭에 커다란 우유 드럼통을 싣고 오면 모두가 기대에 차 바라보며 좋아했다.
통을 열고 분유를 바가지로 퍼서 큰 솥에 우물물을 붓고 장작불에 죽을 끓이면
맨발의 아이들이 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그렇게라도 점심을 굶지 않게 된다고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죽을 퍼주면서 벙글거렸다.
그런데 오늘은 반에서 가장 예쁘고 호리호리한 이매자가 죽을 받아들고
집을 행해 뛰어가다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그만 들고 가던 우유그릇이 엎어졌다.
매자는 무릎이 돌에 긁혀 피가 났다. 그래도 아이는 다시 돌아와 선생님한테
우유를 다시 달라고 양은그릇을 내밀었다.
그러나 솥은 다 퍼내어 빈 바닥이었다. 내가 물었다.
“넌 왜 안 먹고 그것을 가지고 가다가 넘어진 거냐?”
“할머니가 혼자 계신데 아침도 못 잡수셨어요.”
“넌 아침 먹었니?”
“나도 굶었어요. 배가 고팠지만 할머니 걱정이 되어 우유라도 가져다 드리려고 했는데…….”
“그랬구나. 어쩜 좋을까.”
나는 그 아이에게 더 줄 것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다가 다음 날 끓여주려고
남긴 우유통을 열고 가루우유를 양은그릇에 담아 주면서 말했다.
“이거라도 가지고 가서 물에 끓여서 너도 먹고 할머니도 드려라.”
매자는 얌전하게 고개를 납작 숙였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는 어디 가고 할머니만 계시냐?”
“아빠는 작년에 군대에 나가셨고요, 엄마는 돈 벌어 오겠다고 나가셔서 안 계셔요.”
“그랬구나. 온 마을이 어른들은 안 보이고 아이들만 남은 것 같구나.”
실은 그랬다. 6.25전쟁이 나고 3년째에 휴전은 되었으나
20대 젊은이들은 군대에 가서 죽은 사람이 더 많았고 30대부터
40대 장년들은 보급대로 나가 전쟁터에서 군대를 돕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렇게 많지만 집집마다 부녀자와 아이들만 남아 보릿고개를 굶주림으로 넘기고 있었다.
매자가 가루우유를 들고 집을 향해 멀리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잔인한 전생과 혹독한 보릿고개를 언제나 면할까 생각하는데
한 반에서 가장 부잣집 아들로 알려진 서영칠이 와서 물었다.
“선생님, 우리 집서 선생님 모시고 오라는데 가실래요?”
“무슨 일이 있니?”
“우리 할머니 생일이라고…….”
“알았다. 학교 끝나고 갈게.”
그렇게 하고 오후에 영칠이네 집을 찾아갔다. 저녁상을 차리고
고운 비단옷을 입은 할머니와 영칠이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전쟁이 나고 보릿고개가 높아도 부잣집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다.
커다란 교자상에 하얀 쌀밥에 고깃국에 조기구이까지 푸짐하게 차렸다.
나는 밥상이 아무리 대단해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이런 집은 어찌하여 다른 세상인가!
어른들 체면을 생각하여 밥을 몇 술 뜨다 말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시는 노인의 말씀에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런다고 거짓말을 하고 빨리 돌아가야겠다며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여 저런 집에는 기름진 음식이 남아도는가?
그렇게 잘 먹고 살면서 이웃사람들 어렵게 사는 모양을 그냥 보고만 있을까?
나는 그 날 많은 것을 생각했다. 전쟁이 나고 사람이 죽어도
한쪽에서는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네 아이 어른들의 옷차림이 모두 거지꼴인데 그 속에서 편히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무슨 까닭일까? 그 집은 어떻게 하여 그렇게 잘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으로 날을 보내고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한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다가왔다.
“선생님…….”
“왜?”
“선생님 그그…….”
아이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홍자야.”
“선생님 매자가…….”
“매자가 어떻다고?”
“죽었어요.”
죽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소리인가. 나는 놀라 부르짖었다.
“너 선생님 놀려?”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나는 한동안 어이가 없어서 하늘만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그 애가 왜 갑자기 죽었다는 거냐?”
“어른들 말로는 걔가 배가 고파서 가루우유를 날로 먹다가 목에 걸려…….”
홍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가슴이 쿵 소리를 내고 내려앉았다.
어제 가루 유유를 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걸 주지 말았어야 하는데 불쌍하다고 생각하여 준 것이 안 주니만도 못한 된 거다.’
그 날 학교에는 그 소식으로 술렁이었고 교장님과 교사들이 모두 공부를 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오후 선생님들과 한께 그 아이네 집에 갔을 때다.
온 마을 사람들이 다 그 아이네 집에 모여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온 것을 안 이장이 교장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린 것이 배가 고파 가지고 오던
마른 우유를 먹다가 목에 막혀 산 너머 언덕에서 죽고 그 할머니도 굶어서 돌아가셨습니다.
다 제 잘못이고 이웃 잘못입니다.”
그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동네 사람 이십여 명이 모였지만 모두가 비쩍 마르고 일 년 내내
입고 다니던 옷들이 겨우 부끄러운 곳만 가릴 정도로 초라했다.
이웃사람들이 하나같이 자기들이 무정해서 손녀와 할머니가 굶어 죽었다고 가슴아파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서로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와 풀잎을 따다
풀죽을 끓여 먹고 사는 처지들인데 옆 사람을 어찌 챙길 수 있는가.
보릿고개 넘다가 굶어 죽었다는 소리는 한 해에 몇 번씩 들리는 소리였다.
동네 사람들과 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아이와 할머니 장례가 치러졌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내 가슴속에 멍울진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 후 80년이 지나도 그때 입은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