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방/소설

서랍 속의 아이들 1 / 병아리 선생

웃는곰 2025. 4. 30. 19:26

 

서랍 속의 아이들 1 / 병아리 선생

 

초등학교 이영주 선생님은 서울 출신으로 6.25전쟁 피란민이었다.

지금은 정년 되직하고 한적한 산골마을 초당에 앉아 노을을 타고 내리는 석양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먼 세월 끝에서 아득히 떠오르는 아이들이 서랍 속에 가득하다.

1950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경기도 산골까지 피란 나와 낯선 동네 낯선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살았다.

여고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준비 중에 전쟁이 일어나 진학의 꿈을 접고 말았다.

 

전쟁 중인 1952년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교사가 부족하여 고학력자를 모집했다.

산골에는 초등학교 졸업생도 드물던 시절 문맹자가 90%도 넘던 때였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들고 교육청에 응시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열아홉 살짜리가 선생이 된 것이다.

 

내가 배정받은 학교는 군청에서 이십 리나 떨어진 면소재지 깊은 산골이었다.

그래도 당시는 학생이 천 명이 넘었다.

첫날 4학년 3반 담임이 되었다. 한 반에 6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좁은 교실에서 비벼대는 콩나물시루 같은 분위기였다.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익혔다.

 

이름도 모두 여자들은 명자, 옥자, 경자, 순자, 남자들은 철수, 광수. 인수, 영수 등

비슷비슷한 돌림자가 많았다. 내가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만난 제자들은

내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귀한 이름들이다. 4학년을 마치고 한 해 건너 6학년이 된

그 아이들을 또 만나 졸업까지 시켰으니 인연이 깊은 제자들이다.

 

나는 아이들 졸업사진을 지금까지 챙겨 서랍 속에 넣고

수시로 꺼내보면서 아이들 이름을 불러 본다.

당시 아이들은 모두 신발도 없는 맨발이었고 동네에서 잘 산다는 아이 몇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역시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가난이 줄줄 흘렀다.

 

여자 아이들은 단발머리에 서캐가 떡가루를 뿌린 듯 희끗희끗하고

까칠한 얼굴에 비듬이 어려 있었다. 차림은 한결같이 여자 아이들은

광목 흰 저고리에 광목 검은 치마, 남자 아이들은 검은 조끼에 광목저고리로

누르스름한 군대 모포바지에 모두 새까만 맨발이었고 팔소매는 줄줄 흐르는 코를 문질러 번들거렸다.

그래도 모두가 재미있다고 웃을 때는 닦지 않은 누런 황금색 이빨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비루먹은 말처럼 꺼칠한 얼굴이지만 눈빛만은 모두가 샛별처럼 빛났다.

 

그런 가운데 서울에서 피란 온 아이들 몇이 끼어 있었다.

서울 서대문에 있는 학교에서 왔다는 서미옥이는 얼굴이 뽀얗고 예뻤다.

그리고 동대문학교에 다니다 왔다는 나중수는 키도 헌칠하고 얼굴도 멀끔해서 여자 애들이 좋아했다.

아이들은 서울서 온 아이들을 보며 부러워하면서도 서울띠기 서울띠기하고 놀렸다.

그래도 서울 아이들은 은근히 교만하게 굴었다.

1953년 휴전이 되어 전쟁은 그쳤으나 보릿고개 백성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아로 허덕이며 죽지 못해 살았다.

 

회상에 잠겨 놀이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동네 입구로 낯선 자동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누가 이란 산골까지 차를 몰고 올까 하고 내려다보았다.

차에서 미끈하게 생긴 신사가 내려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신사는 바로 앞까지 와서 물었다.

실례합니다. 이 동네에 이영주 씨라는 어른이 사시는 집을 아시겠습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니 누굴까? 그러나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은 왜 찾으시나요?”

, 저 어렸을 때 담임 선생님이셨는데 이 마을에 사신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모르는 사람인데 나를 찾는 제자라니?

댁은 누구신가요?”

저는 진영진이라고 합니다.”

진영진? 진영진이라고요?”

혹시 이영주 선생님이 아니신가요?”

맞아요.”

 

나는 그 이름을 부르면서 60년 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랬다. 어리고 순진하고 가난에 찌든 제자들의 얼굴.

그 가운데 특히 효자였던 진영진의 눈물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영진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