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당에 빠진 국자 67-73까지-계속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67. 책값 받으시오
“남새스리 그런 말씀 마서유. 난 쥐구녕으로라도 들어가고 싶구먼유.”
회장이 사투리로 웃으며 말했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녀유. 오랜 소주 친구였잖유.”
“참말 부끄럽네유. 이런 회장님인 줄 모르고 고서나 찾는 장님인 줄로만 생각했으니 말유.”
“나는 영감님을 만나서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은 장님이지유.”
“야?”
“난 허세 부리는 걸 싫어하쥬.”
하필이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회장님은 고향이 어디시래유?”
“서울이쥬.”
“그런디 충청도 사투리를 저보다 잘하시네유.”
“한국에 살면서 한국말 다 하는 게 맞잖유?”
“그만 서울말로 하세유. 듣기 거북허니께유.”
회장은 다시 서울말로 대답했다.
“자. 우리 거래는 끝냈으니 책값 받으시오.”
“벌써유?”
“큰돈이라 들고 다니시면 안 되니 은행계좌로 이체할 테니 은행 번호나 대주시오.”
“은행이 아니라 우체국인디유. 여기 있어유.”
하필은 우체국 통장을 내놓았다. 회장이 비서한테 일렀다.
“이 통장 가지고 경리국에 가서 내가 지시한 대로 이체하고 오세요.”
하필은 속으로 정말 9억을 준다는 말이 헛말이 아닐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이건 꿈이 아닌가. 평생에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니 말이다.
잠깐 사이에 비서가 다녀와 통장을 회장한테 올렸다. 회장은 들여다보고 말했다.
“약속대로 전액 입금했습니다. 자, 확인해 보시지요.”
하필은 통장을 들여다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회장님 말씀만 믿으면 되지유.”
“그래도 확인을 하셔야 합니다. 확인해 보세요.”
하필은 통장에 입금된 것을 보고 놀랐다. 9억이 아니라 10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회장님, 혹시 잘못 되신 거 아닌가유?”
“맞아요. 내가 깎지 않고 다 드린 거니 그리 아시고 우리 내려가서 소주나 한잔 하십시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68. 내 돈 내 맘대로 아녀?
이 말에 하필이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야?”
전에는 상대가 그렇게 큰 회사 회장인 줄을 몰라서 소주나 한잔씩 했지만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장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여기서꺼정 그런 걸 드신다구유?”
“사람은 장소에 따라 변하면 안 되지요. 옛날 합정동에서나 천안에서나, 그 사람이 나이고, 내가 그 사람이 아닌가요?”
“그리 말씀허시니 그 말씀이 진리지유.”
그리하여 하필은 허당과 더불어 회장님이 단골이라고 하는 골목 안 대중음식점에서 점심 겸 소주 몇 잔을 나눌 때 하필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회장님은 고서와 고물들을 다 어디다 쓰실 건가유?”
“우리 회사에 박물관을 하나 만드는 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중히 생각되는 골동품과 예술품을 모두 모아 전시하려고 합니다. 이 담에 완성하면 초대할 테니 그때 와서 보시지요. 영감님도 우리 사업에 큰 공로자이십니다.”
회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속으로 ‘7십억이 넘는 보물을 십억에 주셨으니 거저지요, 거저’ 하면서 웃었다. 허당은 두 어른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회장님의 소박하고 겸손한 자세는 부자한테서 찾아볼 수 없는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을 떠나 돌아가는 차에서 하필은 묘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큰돈이 생긴 건 허당 덕인디, 이 돈을 7대 3으로 한다면……. 그건 안 되지, 3억을 줘야 하는겨?……. 아니야 걔가 아니면 이런 복이 터지남?…… 그래도 돈이 너무 커서……. 이걸 하우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 턴디 우짜지…….’
차에서도 그랬고 밤에 자다가도 곰곰 생각하다가 아침에 결심을 했다. 허당 앞으로 3억을 송금하기로.
우체국에 가서 3억 이체를 하고 통장을 들여다보니 허당도 3억 오천이나 되는 부자가 되어 있지 않은가!
허당 것하고 자기 것을 합하면 13억이 넘는다. 그 돈이면 책 곳간을 더 크게 지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하필은 또 번민할 일이 생겼다.
‘어차피 허당 모르게 만든 통장이니 통장을 없애고 내 통장에다 모으면 아무도 모를 것이 아닌가베. 나만 아는 비밀. 내가 해놓았던 거 내 맘대로 하는데 문제 될게 뭐여어.’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69. 허허 별꼴이여어
하필은 금방 넣은 통장을 해지하고 자기 통장에다 합하려고 담당 직원한테 말했다.
“미안허지만 허당으로 된 이 통장 전액을 내 통장으로 이체해 주슈.”
직원이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러세요?”
“내가 돈을 잘못 넣어서 그려유.”
“그건 어려워요.”
“우째서 어렵다는규?”
“지금 이체한 금액도 크고 먼저 통장 잔고도 많아서 본인이 오시지 않으면 내 맘대로 이체시킬 수가 없어요.”
“뭐여유우? 내 돈 내 맘대로 한다는디 이 뭔 소려?”
“아무리 그러셔도 허당 이름으로 된 통장이기 때문에 본인 허락 없이는 이체할 수가 없어요.”
“내가 3억을 금방 넣었잖유?”
“그래도 안 됩니다.”
“허허, 이 뭔 소려?”
“죄송하지만 허당 씨를 모시고 오세요. 그래야 해드릴 수 있어요.”
“주인인 내가 하는디 그래도 안 된다는규?”
“예. 절대 안 됩니다.”
“허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저금한 돈 내 맘대로 못한다니 이게 말이 되나유?”
“그렇지만 통장 주인이 다르지 않습니까.”
“허허 허허 별꼴이여어.”
하필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와 곳간으로 갔다. 그 사이에 허당은 책을 찾고 하우는 책들을 한쪽으로 날라다 모으고 있었다. 하필이 눈에 허당이 갑자기 도둑처럼 보였다.
“뭣들 혀어?”
하우가 대답했다.
“아빠, 우리 오늘 바빠. 주문장이 3장이야.”
“우리? 누가 우리여어?”
“허당 오빠하고 나하고.”
“씰대 없는 소리 마아.”
하필은 이럴 때 소주라도 한잔 해야 속이 풀린다. 참새 방앗간 찾듯 국자네 가게로 갔다. 국자는 두리두리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바쁘게 일하다가 하필이 오는 걸 보고 반겼다.
“웬일여? 대낮에 일은 우쩌구?”
“갸들이 다 하고 있으니께 난 술이라 퍼야 것어어.”
“허당하고 하우가 붙어서 일헌다구?”
“그려어.”
“갸들 그렇게 두면 안 되는 건 알쥬?”
“아무리 그래도 내 맘은 달러어.”
“그렇지? 허당이허고 하우는 안 어울려. 짚신도 보아가며 짝을 맞추어야 하는겨. 안 그려?”
“씨끄러워 술이나 줘어.”
하필은 혼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늙은 호박같이 불그레한 얼굴이 되어 곳간으로 돌아왔다. 이층에서 하우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책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오빠는 어디서 보았어?”
“다 추억 창고 속에 있는 콘텐츠여.”
“그 추억 속에 있는 워드 가운데 나한테 주고 싶은 말은 없어?”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70. 뭘 주고받고 달라는 겨어
하우가 묻는 말에 허당은 말없이 마음으로만 고백했다.
‘하우, 넌 내 맘 몰러, 난 워드만 주고 싶은 게 아니라 나를 몽땅 하우 품에 안겨주고 싶어…….’
솔직한 생각은 그렇지만 말로도 못하고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면서 하우만 만나면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 손을 잡고 산이든 바다든 어디로든 데리고 달려가고 싶고 와락 끌어안고 싶은 백일홍 같은 하우다. 가슴에 숨은 말은 그렇게 많아도 하필 영감을 생각하여 마음을 모질게 접고 사는 허당이다.
하필이 하우가 뭘 달라고 조르는 소리를 귓등으로 들은 하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주고받고 달라는 겨어?”
하우가 나비처럼 가볍게 이층에서 내려오며 불만스런 얼굴로 말했다.
“아빠, 아래층에서 우리가 하는 말만 엿듣고 있었어?”
하필은 고명딸 하우한테는 꼼짝 못한다.
“뭘 들어어. 내가 해본 소려어.”
“주문받은 책 다 찾아놓았어. 내일 오빠하고 납품할 거야.”
하필은 어이가 없었지만 할 말도 없어서 애매한 허당한테만 말꼬리를 틀었다.
“알았으니께 허당도 그만 가 봐아.”
하필은 기세등등하다가도 말밑천이 바닥나면 콕 엎어지는 순박한 인물이다. 그렇게 하여 하루가 가고 다음 날이다. 하우가 서둘러 다마스에다 책을 채우고 허당을 기다렸다. 허당이 오늘은 늦게 왔다.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혀, 내가 소속한 단체에서 오늘 대천 해수욕장에서 해변 세미나를 한다는디 나한티 가이드를 부탁헌다고 누가 찾아와서…….”
“무슨 단체야?”
“그런게 있어.”
“그런게 뭐냐고?”
“그런 건 묻지 말고 책 납품이나 혀.”
“해변 가이드는 몇 시에 어디서 하라는 거야?”
“열두 시면 대천에 도착한다니께 납품하고 가면 딱 맞을 거 가텨.”
“좋아, 책 납품하고 내가 운전하고 같이 가서 도와줄게. 그래도 되지?”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71. 허박사라고 놀리기 때문
“안돼, 그러지 말어. 난 버스 타고 댕겨 올겨.”
“싫어, 난 결정했어. 오늘 휴가 내고 같이 갈 거야. 그리고 오빠 멤버들 가운데 맘에 드는 사람도 있나 찾아보고.”
“안 된다니께.”
“안 되는 이유가 뭐야? 대 봐,”
“그 멈버들은 나를 엉터리 박사 촌놈이라고 놀리기 때문에 하우한테 보여주기 싫어서 그려.”
“됐어. 그런 사정이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어. 나도 멤버들을 따라 허박사 허박사 촌놈 하면 되겠네.”
“안 된다니께.”
“오늘 허박사가 나를 떼어놓지는 못할 걸 호호호.”
“하우까지 놀리면 안 돼야.”
“그러니까 내가 하자는 대로 해. 알았지, 오오빠아.”
고집 센 하우는 책 납품을 하고 휴가를 냈다. 그리고 차를 몰았다. 하우는 운전대만 잡으면 신이 나서 쌩쌩 달린다. 딱 열두 시 정각에 해변 세미나 장소에 도착했다. 다른 멤버들은 벌써 전세 버스로 와 있었다.
하우가 모는 다마스에서 허당이 내리자 멤버들이 와르르 몰려들며 제각기 불러댔다.
“야, 허박사 오랜만이다.”
“허허 촌뜨기 허박사 출세했네.”
“이게 누구냐? 자가용도 있고 아가씨 운전사까지 두고 출세했어. 하하하.”
허당이 인사를 받았다.
“여기꺼정 오느라고 대간들 했지?”
“촌놈 허박사, 넌 언제나 충청도 사투리를 버릴래?”
어떤 친구가 이런 말도 했다.
“허박사는 충청도 사투리를 할 때 가장 잘 어울리고 멋있어! 그게 바로 고향 사랑 아닌가. 하하하, 안 그런가?”
하우는 멤버들이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허당이 한 말 그대로라는 걸 알고 놀려대는 걸 이해하기로 했다. 한 사람이 차 안을 들여다보며 인사했다.
“기사 아가씨, 처음 뵙습니다. 아가씨도 내려오세요.”
허당이 가로 막았다.
“이러지 마, 우리나 저리로 가.”
또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며 권했다.
“운전사 미스 코리아 아가씨도 내리세요.”
하우가 차에서 사뿐히 내렸다.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72. 저 미녀는 누구야?
그 순간 호기심에 찬 멤버들이 하우를 둘러서서 맞았다. 허당의 멤버들은 모두 농담을 스스럼없이 하지만 하나같이 젠틀맨들이었다.
바다 쪽으로 걸어가면서 한 멤버가 허당한테 물었다.
“허박사, 같이 온 저 미녀는 누구야?”
또 다른 사람도 물었다.
“보통 운전사 같진 않은데 섬싱 사이?”
허당이 어물어물 대답했다.
“아, 아무것도 아녀.”
“그런데 차를 같이 타고 다녀?”
이때 하우가 대신 대답이라도 하듯 허당을 불렀다.
“오빠. 천천히 걸어.”
허당이 돌아보고 차로 가라고 제스처를 했다. 그러나 하우는 엉뚱한 대꾸를 했다.
“노굿이야, 오빠. 이렇게 핸섬한 멤버들을 두고 어딜 가.”
허당은 당황했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어서 묵묵히 걷고 있는데 한 사람이 징한 소리를 했다.
“허박사 동생이 맞지?”
“…….”
“허박사, 예쁜 동생하고 나 미팅 안 될까?”
곁에서 걷던 멤버가 농담을 했다.
“미스터 주, 늦었어. 허박사가 내 처남인 줄 아직 몰랐나?”
“뭐라고? 언제부터 처남 매부지간?”
하우는 그 소리를 듣고 깔깔대며 허당을 불렀다.
“오빠, 난 어떡해?”
허당이 되물었다.
“뭔 소려?”
“오빠 멤버들이 다 내 이상형이야. 호호호.”
허당은 기가 막혀 말도 못했다. 주위 멤버들이 좋아서 모두 와아 하고 웃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짓궂게 물었다.
“아가씨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하우가 간단히 대답했다.
“우예요. 우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허당 동생 허우라는 말씀인가요?”
하우가 웃으며 받았다.
“허우나 하우나 우는 맞아요.”
난처해진 허당이 목청을 높여 큰소리를 질렀다.
“바다다, 파란 바다가 웃는다아!”
하필 허당에 빠진 국자/73. 완전한 공짜는 없는겨
해변 세미나라는 바람에 기대가 컸는데 겨우 ‘공짜심리와 욕심’이라는 주제로 강사도 없이 돌아가며 모두 자기 경험담을 털어놓는 대회였다.
모두가 경험담을 신나게 쏟아놓는데 허당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우가 답답하여 입을 열었다.
“오빠, 뭘 해? 한 마디 해.”
이때 한 멤버가 끼어들었다.
“허박사는 원래 그래요. 그래서 촌놈 소리를 듣고도 허허거리는 박사지요.”
이윽고 허당이 유머 비슷한 한마디를 던졌다.
“세상에서 공짜로 얼마든지 나누어 줄 수 있는 건 웃음과 책뿐이여. 하하하.”
그리고 한 마디 더.
“공짜로 준다면서 속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 앞으로! 세상에 완전한 공짜는 없는겨. 알겠나 제군!”
멤버들이 박수를 치면서 와아하고 웃으며 화답했다.
“허박사 말이 명답이야. 오늘 세미나 톱 아웃!”
이렇게 해변 세미나는 끝나고 진한 노을이 바다 끝에 다홍치마 펼쳐놓듯 황홀한 그림을 그려놓고 대머리 석양은 바다 속으로 숨었다.
이행들은 다 전세 버스로 떠나고 하우와 허당만 남았다.
“오빠, 우리 저쪽 잔디밭에 가서 놀다 가자.”
“안 되어. 싸게 가야혀.”
“뭐가 안돼, 저 아름다운 잔디밭에서 바닷바람도 더 쐬고 가자, 오빠아.”
허당은 못 들은 척하고 주차해 놓은 방향으로 걸었다. 하우가 달려와 팔짱을 끼며 불만했다.
“오빠, 이제부터 내 맘에 안 들 땐 허박사 하고 부를 거야. 그래도 좋아?”
“맘대로 혀. 난 박사가 아닌게.”
허당도 속으로는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 아픈 추억만 만들 것이 빤하기 때문에 참고 모르는 척하고 차 앞까지 걸어가며 말했다.
“너무 늦으면 아저씨한티 지청구 맞어.”
“우리 아빠가 그렇게 무서워?”
“무섭지는 안혀도 그런게 있어.”
결국 차에 올랐고 하우가 운전대를 잡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내 말만 들어야 해, 오빠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