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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소설 / 허당에 빠진 국자 21-30

웃는곰 2025. 9. 17. 10:56

허당은 굽신했다.

좋지유. 그럼 오늘 열 권만 가지고 갈게유.”

허당은 정거장으로 나갔다.

역시 정거장에는 오는 차 가는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허당은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이한테 가서 말을 건넸다.

 

차 기다리기 지루하시쥬?”

. 차가 연착한다고 하니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그러시면 이 책 중에 맘에 드는 거 하나 집으세유.”

사라고요?”

아녀유. 보시다가 차가 오거든 돌려주고 가세유.”

 

그 소리를 옆에서 들은 부인이 물었다.

정말 거저 빌려주시는 거예요?”

. 거저 보시라는 거유. 그 대신 차가 오면 저한테 꼭 돌려주고 가셔야 혀유.”

알았어요. 행복이 주렁주렁이라는 동화책을 빌려주세요.”

그러쥬. 보세유. 그 대신 차가 오면 꼭 돌려주셔야 혀유.”

 

이때 아가씨가 다가와 시집을 가리켰다.

추억의 울타리엔 경계가 없다라는 시집 좀 빌려주세요.”

고마워유. 보시고 있다가 차가 오면 꼭 돌려주고 가세유.”

알았어요. 꼭 돌려드리고 갈게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먹는다더니 이 사람 저 사람 달려들어 다 빌려갔다.

정거장에 책 보는 사람들이 주르르 늘어서니

서양 사람들 그림에서 보는 사진보다 보기 좋았다.

허당은 날마다 이렇게 책을 빌려주고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거저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서울 가는 차가 들어왔다.

젊은 사람이 책을 보다 말고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이 책 사가야겠습니다.

한참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책값이 얼마지요?”

 

그렇게 좋으시면 그냥 가져가세유. 거저.”

세상에 거저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네요.

 

차가 와서 급해요 작지만 이것만 드리고 갈게요.”

그 사람이 차에 오르는 뒤에다 대고 말했다.

아니여유. 거저, 가져가세유.”

이때 뒤따라 차에 오르는 아주머니가 말했다.

 

행복이 주렁주렁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요.

미안하지만 이것만 받으세요.”

그리고 아주머니가 만 원을 쥐어주고 차에 올랐다.

뒤따라 급하게 서두는 아가씨가 시집을 들고 말했다.

 

이 시집 너무 좋아요. 저도 앞사람처럼 만원만 드려도 되지요?”

아녀유. 그냥 가져가세유. 거저유 거저.”

책은 거저 가져가면 안 돼요. 고마워요.”

 

아가씨가 가고 나자 뒷사람들이 급히 만원씩을 주고 다 차에 올랐다.

허당은 주먹에 쥐어져 있는 돈을 추리면서 중얼거렸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여. 보다가 돌려달라는데 거저 준대도 싫다고

돈을 내는 사람들이 우찌 이리 많은가 모르것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책을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몰랐구먼.”

 

허당이 책 곳간으로 달려가 하필이 앞에 돈을 내밀었다.

이거 받으슈.”

뭐여?”

돈이쥬.”

또 돈이여?”

이렇게 말하는 하필이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나도 장사 한번 해보자

하필이 생각해 보니 정거장에 가면 책이 잘 파리는 모양이라.

그래서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리어카에 책 천 권을 싣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징그럽게 많은 책 나도 장사 한번 해 볼 겨어.

허당이 열 권 가지고 만원씩에 다 팔았으니 나는 염가로 한탕 뛰어 볼겨어.

좋은 책을 한 권에 1000씩 싸게 판다면 공짜지,

그럼 책 안 사갈 사람이 어디 있간디.

천 권이면 눈 껌쩍헐 새에 백만 원이 들어올 거구먼.

허당 땜시 책 장사 제대로 하게 생겼어어.’

 

하필이 깨끗하고 두꺼운 책 1000권을 골라 싣고 정거장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바쁘게 오가는데 누구 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부터 점심을 굶어가며 오정이 한참 지났지만

한 권도 팔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한 권에 천원, 천원 하고 소리쳤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도로 끌고 돌아가자니 좀 부끄러운 생각도 들고 기분도 상해서

에따 거저라도 나누어 주고 가자. 허당도 나누어 주었다는디 돈을 받지 않았남.’

그렇게 생각하고 지나가는 신사한테 책을 내밀었다.

 

이 책 거저유. 받으시유.”

그 사람은 들은 체도 않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이 다가오기에 책을 내밀었다.

선상님, 이 책 좋아요 받아가슈.”

그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이 사람 왜 이래? 내가 언제 책 달랬소?”

기분 나쁘게 한마디 던지고 눈을 흘기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젊은 아기엄마가 오기에 다가가 책을 내밀었다.

이거 받으슈. 거저유 거저.”

 

지금 누가 책을 본다고 그래요. 거저도 싫어요.

스마트폰 보기도 바쁜데 별꼴이야.”

보기보다 예쁘고 단아한 젊은 댁이 정나미 떨어지는 소리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하필은 기가 차서 누구한테 거저 주겠다는 말도 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이때 젊은 사람이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하필은 용기를 내어 비싸고 두꺼운 책을 내밀었다.

젊은 양반, 이 책 그냥 드릴 테니 받으슈.”

젊은이가 엉뚱한 소리로 대꾸했다.

 

요새 그 무거운 책을 누가 들고 다녀요.

내가 공짜라면 혹할 사람으로 보이시오? 괜히 짐만 되는 걸.”

 

하필은 절망했다.

이럴 수가 있나!

거저 준다는데도 모두 싫다고 하니

출판사며 서점이 문 닫는 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하필이는 울고 싶었다.

책을 리어카째 어디든 끌고 가서 콱 처박고 엉엉 울고 싶었다.

그래도 울지는 못하고 억지로 참고 멍하니 서서 예쁘고 화려한 책들만 들여다보았다.

볼수록 예쁜 책들을 마치 빵점 받고 쫓겨나서

우는 아들을 들여다보는 심사로 서 있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영감님, 하필이면 왜 책장사를 하시오?

책 살 돈이 있으면 참외나 수박이나 그런 먹거리 장사를 하지 하필, 하필…….”

하필이 하필 하필 하는 소리에 화가 났다.

 

이봐유. 하필 하필 하지 마슈.”

제가 뭐 잘못했나요? 

세상에 장사할 것도 많은데 하필 책장사를 하시니 하는 말이지요.”

 

하필은 부아가 나는 걸 참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다 싫다는 책을 억지로 주는 게 아니다.

책 볼 사람은 따로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고

이어카를 끌고 돌아가자니 다리도 무겁고 배도 고파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그 때 한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보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요새도 딸따리 이동서점이 있는가 보네.”

그 소리에 하필이 책 한 권을 들고 다가갔다.

여사님, 이 책 그냥 드릴게유. 받으실래유?”

나 돈이 없는데.”

 

거저유. 받기만 하세유.”

노인이 책을 받으며 말했다.

이렇게 귀한 책을 그냥 주신다고요?”

. 거저유.”

할머니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꼭꼭 접은 오천 원짜리 하나를 꺼내어 내밀었다.

내가 가진 게 이것뿐이라 더는 드릴 수가 없어요.

지금 주신 책은 삼만 원도 넘는 귀한 책인데 오천 원에 살 수는 없고,

저기 있는 동화책 왕따 대통령으로 바꿔주시면 안 되겠수?

하필이면 대통령이 왜 왕따를 당했을까?”

 

하필은 또 하필이란 소리가 듣기 안 좋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할머니가 고맙고 존경스러워서

왕따 태통령마저 꺼내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여사님, 두 권 다 드릴게유.”

이러시면 밑져요.”

밑질 것도 없어유. 다 거저니께유.”

할머니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사님이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한참 되었는데

할망구, 할매, 늙은이 하는 소리보다는 듣기 좋구려.”

고마워유. 주시는 돈 잘 받겠어유.”

할머니가 책을 소중하게 가슴에 안고 인사를 한 뒤 돌아갔다.

하필은 오천 원을 두 주먹 속에 곱게 넣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모처럼 사람대접 받고 받은 돈이 아닌가.

오천 원이 눈물겨운 소중한 소득이었다.

그렇게 하여 용기를 겨우 낼 수 있는 하필은 무시당한 수모를 참고,

참고 견디고 책 곳간 사업장으로 돌아왔다.

 

언제 왔는지 직장에서 돌아온 딸이 웃으며 맞았다.

아빠, 또 어디서 책을 그렇게 많이 받아왔어요?”

, 저기서……. 언제 왔어?”

우리 도서관에서 홀로코스트라는 책 스무 권이 필요해서 구하는데 이 안에 있을까?”

그런 거라면 출판사에 알아 봐야지.”

 

출판사에는 없대요. 재고가 많았었는데 다 안 팔리는 책이

자리만 차지한다고 몽땅 버렸대요.”

그 책이 있으면 좋을 텐디, 이 많은 책 속에 어디 있기나 할라나 모르것다.”

아빠. 무슨 책이든 가져다 놓으면 버리지 말아요.

요새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장사가 안 된다고 책을 버리고 나서

막상 독자가 책을 찾으면 없는 출판사가 많아요.”

허어, 그려? 이 책들이 언젠가는 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날이 있겠구먼.”

맞아요, 아빠.”

 

이때 허당이 껑충껑충 들어왔다. 딸이 하필한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 요새 나하고 동업하는 청년이여. 서로 인사햐.”

하필이 허당한테 딸 소개를 했다.

 

이 여아가 내 딸 하우(河㥥). 인사햐.”

허당이 수줍게 인사했다.

저는 허당이라고 혀유. 잘 보아주세유.”

허당 씨라고요? 진짜예요?”

진짜지유. 허당이라 이상혀서 묻는 거쥬?”

미안해요. 허당 씨.”

 

허당은 허당에 씨자를 붙여 부르는 소리에 갑자기 마음이

꽃밭을 만난 듯 우쭐하고 기뻤다. 그래서 인사말을 했다.

미안할 것 읍시유. 하우도 하우두유둔데유 뭐.”

호호호, 내 이름이 하우두유두?”

 

하필이 허당한테 서둘러 말했다.

하우가 다니는 도서관에서 홀로코 뭐라는 책을 찾는다는디

이 많은 책 속에 어디 숨었는지 알간.”

홀로코스트인 모양인디 을마나 필요한대유?”

하우가 대답했다.

이십 권이에요.”

책갑도 솔찬겠구먼유. 우쨌든 찾아 봐야쥬. 있으면 심봤다 아녀유?”

하우가 웃으며 말했다.

심봤다지지요. 찾으면 심봤다 하고 소리치세요. 호호호.”

 

하필이 딸한테 말했다.

넌 집에 가서 마실 거라도 좀 해갖고 와. 그 동안 우리는 책을 찾아볼 텐게.”

알았어요. 아빠 꼭 찾으세요.”

허당이 돌아가는 하우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그 꼴을 보던 하필이 꾸짖듯 말했다.

뭘 그리 봐. 사람 첨 봤나?”

말하는 것도 귀엽고 걸어가는 모습이 예뻐서 봤시유.”

알았어. 그만 보고 책이나 찾아 봐.”

알았슈.”

 

허당은 주인 하필과 이리저리 뱅뱅 돌며 책을 찾았지만

그 책은 안 보이고 하우 웃는 모습만 어른거렸다.

곳간에 책이 어림잡아 백만 권도 넘을 것 같은데 어디서 그 책을 찾는단 말인가.

아무리 뺑뺑이를 쳐도 책은 보이지 않고

허당이 눈에는 예쁜 하우 웃는 얼굴만 삼삼했다.

 

내가 왜 이려? 괜히 맴이 왜 이리 뒤숭숭한겨?

이상혀. 입때껏 여자 같은 건 나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디

하우를 보고 난 뒤 왜 맴이 이렇게 뒤숭숭한지 모르것어. 왜 그런겨?’ (계속)